TIMELESS TREASURE
침묵과 고요가 머무는 12세기 고성. 컬렉터, 갤러리스트, 인테리어 디자이너, 라이프스타일 코치 등으로 불리는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의 집에는 공간마다 가장 사적인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삶과 일의 동반자 악셀과 아내 메이는 함께 악셀베르보르트 컴퍼니를 설립해 예술·디자인계를 지원하고 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 시내에서 20분가량 달리는 동안 시선은 점점 땅으로 내려갔다. 콘크리트 건물도,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도 점점 사라졌다. 아스팔트 길도 푸른 들판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세상 속 소란과 멀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목적지 카스텔 판스 흐라벤베절Kasteel van’s Gravenwezel 성이 눈앞에 등장했다. 12세기에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려 만든 중세 건축물은 당시 안트베르펜 지역을 보호하는 요새 역할을 하던 성이었다. 높은 성벽은 물론 주위를 연못으로 두른 해자 건축 구조를 띤다. 침묵과 고요가 안개처럼 깔린 이곳에는 컬렉터, 갤러리스트, 인테리어 디자이너, 라이프스타일 코치 등으로 불리는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이하 악셀)가 거주한다. 사실 악셀의 커리어 결과물을 접할수록 그의 주거 공간을 낱낱이 살펴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힙합 가수 카녜이 웨스트는 그를 구루(스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라 칭하며 함께 책을 출판하고 캘리포니아 집을 통째로 맡겼다.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 가수 스팅, 패션 디자이너 발렌티노와 이브 생 로랑 등 수많은 명사도 자신의 삶과 일에 영향을 준 인물로 주저 없이 악셀을 꼽았다. 이미 디자이너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였지만 〈Timeless Interiors〉(Flammarion, 2007), 〈Wabi Inspirations〉(Flammarion, 2010), 〈Stories and Re, ections〉(Flammarion, 2018), 〈Portraits of Interiors〉(Flammarion, 2019) 등을 출판한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프로젝트도 방대해졌다. 최근 몇 년간 미니멀리즘, 와비 사비 스타일, 재팬디(Japandi, 일본과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을 결합한 스타일), 힐링 디자인 등이 세계적인 인테리어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악셀에게 영감받은 많은 디자이너의 공이 크기도 하다. 이 외에도 현대미술 트렌드를 이끄는 갤러리스트로 세계적인 활약을 펼치는 그가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과 아름다움을 일구는 사적인 공간은 어떻게 숨 쉬고 있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탐미주의자의 미적 감각과 그 결을 따라 이 공간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악셀의 감각과 스타일은 글로 또렷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추구하는 공간은 침묵과 여백으로 채워져 있고 논리보다 감각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쌓아온 안목과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한 예술품 수집을 통해 극도의 평온한 무드를 공간에 담는다고 설명한다. “ 고요한 상태를 만든다는 것은 비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대와 스타일이 다른 물건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게 하는 것에 가깝죠. 너무나 조화로워 자연스러운 상태, 즉 정적인 상태가 되는 거죠.” 그의 손길이 머문 공간에서는 작은 소품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지점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그가 미술, 철학, 과학, 문학 등에 근거를 둔 비율과 기하학을 연구한 덕분이다. 점, 선, 면의 비례와 구조를 절묘하게 맞추면 비어 있어도 허전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암울하지 않은 적절한 분위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악셀의 공간에 들어서면 그의 사상에 매료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제가 하는 일은 인테리어 장식과 다릅니다. 저는 거주하는 이의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이란 개념을 무색하게 만들어 시대를 초월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죠. 세월의 조화, 건축에 대한 존중과 비례의 순수성, 아름다움과 품질에 대한 끝없는 탐색,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가 사는 집은 그런 악셀만의 영적 인테리어를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 서 그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섞고, 동서양의 경계를 부수며, 세상의 모든 재료를 날것 그대로 펼쳐놓는다. 오래되어 낡고 부서진, 시간의 흐름이 드러나는 다양한 물질을 골고루 배치함으로써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즉 ‘타임리스timeless’의 순간을 완성한다.
카스텔 판스 흐라벤베절은 크게 고성과 별채로 나눌 수 있다. 별채는 원래 마부들이 살던 집, 마구간, 마차 보관 공간 등으로 최근에 레노베이션을 마쳤다. 자식들이 분가하면서 부부를 중심으로 공간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마침 아들 보리스의 결혼식을 성에서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게스트하우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별채 1층에는 대형 리셉션 룸이 있고, 마차가 도열해 있던 장소에는 고대 항아리, 부서진 로마·그리스 조각상, 부조 작품을 드문드문 놓아두어 콘서트홀 또는 파티룸으로 사용한다. 아치형 대형 창문을 통해 야외 풀장이 보이는 자리는 정원 관련 서적, 가드닝 도구, 푹신한 소파가 놓인 서재로 부부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목재 바닥과 푹신한 좌식 소파로 채운 다락방은 도자기를 만들거나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비밀 공간 같은 장소다. 이처럼 별채가 현재진행형 일상과 맞닿아 있다면 고성은 악셀의 과거, 즉 오랜 시간 축적한 컬렉션을 통해 그의 깊은 지혜와 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고성으로 가려면 안개가 자욱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후 말끔히 정리된 정원이 등장하고, 발아래서 자갈돌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현관에 진입한다. 1층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작품을 진열한 서재, 스터디 룸, 거실이 연달아 등장한다. 공간마다 컬러도, 재질도, 스타일도, 시대도 다르지만 불협화음 같은 수집품은 악셀의 감각 아래 정확하게 조율되었다. “고성과 별채를 포함하면 약 50개의 방이 있어요. 방마다 분위기가 달라요. 한번에 모든 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하나씩 컬렉션을 쌓아왔기 때문이죠. 모닥불을 쬐면서 생각을 비울 수 있는 명상실, 정원이 보이는 작은 창을 벗 삼아 글을 쓰는 다락방, 진귀한 공예품이 가득한 도서관 등을 오가면서 다른 시대에 와 있는 듯한 경험을 하죠. 공간이 제법 크지만 모든 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목적과 상황에 따라,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어느 방으로 향할지를 결정하는 거죠.”
아시아에서 직접 구입한 고대 유물로 채워져 있는 오리엔탈 룸 내부.
손님들이 가장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곳은 ‘와비 룸’이라 이름 붙인 방이다. 와비 사비는 불완전하고 오래된 것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비워내고 덜어낼 것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거친 나무 바닥과 벽, 세월과 사람에 의해 깎이고 흔적이 묻어나는 가구, 깨진 도자기 등으로 가득한 방은 낡은 조약돌 하나조차 자연을 인식하는 매체가 되며 공간과의 연결 고리가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요와 여백에 대한 그의 감도 깊은 철학이 반영되어 있는 장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파고들었다. 그러한 몰입은 본질에 집중하며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만족을 느끼고, 소박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아티스트 루초 폰타나Lucio Fontana, 애니시 커푸어Anish Kapoor, 일본 구타이 운동을 이끈 아티스트 시라가 가즈오Shiraga Kazuo 등 고요한 침묵을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최근에는 한국 작가들에게 빠져 있어요. 제 갤러리에서 배병우, 김수자, 정창섭, 윤형근, 권대섭 같은 작가의 전시를 열었죠. 한국도 여러 번 방문했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포함해 비례미가 돋보이는 한옥 건축물과 선비 정신에 큰 영감을 받았어요. 또 단순한 원형과 컬러가 특징이지만 알고 보면 복잡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마음을 건드리는 달항아리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악셀은 자신의 미학과 삶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화가 예프 베르헤얀Jef Verheyen을 언급했다. 그의 아버지는 말 중개인이었고, 어머니는 오래된 집을 구입해 예술가에게 임대하는 부동산 사업을 했다. 부모님이 왕족부터 예술가까지 풍부한 인맥을 형성한 덕분에 그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예술과 학문을 접했고, 그 영향으로 20대부터 예술품을 수집할 수 있었다. “23세 무렵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안트베르펜 중심 지역, 15세기와 16세기의 주택 11채가 줄지어 있는 골목길 전체를 구입했어요. 집이 매우 낡아서 보수를 해야 했는데,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과거 분위기를 살리면서 변화를 주고자 했죠.” 그는 이를 ‘블라예켄스강Vlaeykensgang 프로젝트’라 이름 붙이고, 아내 메이May와 함께 악셀 베르보르트 컴퍼니를 설립한다. 오래된 집과 길을 살피고 과거 원형을 찾는 작업은 자연스럽게 역사, 인문학, 건축학, 디자인 등을 공부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또 이를 통해 다양한 예술가, 철학자, 수집가 등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이 바로 화가 예프 베르헤얀이었다. 예프 베르헤얀은 ‘보는 것은 눈으로 느끼는 것이다’라는 명제 아래 1950년대 제로 운동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악셀은 제로 운동 작가들과 깊이 교류하면서 사물은 본질 그자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의 타오이즘, 일본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젠 사상, 그리고 한국의 불교 문화·단색화·자연주의 등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앤티크 딜러로 파리 앤티크 비엔날레에 참가했는데, 그 당시 가장 어린 예술품 딜러였다. 16세기 블라인더, 14세기 고딕 오크 테이블, 바로크 시대 책장, 거북 등껍데기와 우드로 만든 캐비닛 등 보물 같은 앤티크 물건으로 채워진 그의 부스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부유한 클라이언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국제적 인사들과 패션·예술계 유명 인사들을 만났고 관계를 지속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로 발전시킨다.
안트베르펜에서 20분 거리의 베이네험Wijnegem에 위치한 복합문화 공간 카날은 오피스, 오가닉 푸드 마켓, 레스토랑, 극장 그리고 악셀 베르보르트 컴퍼니의 오피스와 갤러리가 들어선 작은 예술 왕국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악셀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보리스와 딕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860년 증류소로 지은 후 1950년대 맥아 양조장으로 쓰이던 이곳을 1997년 구입했고, 수년에 걸쳐 가족 모두 의기 투합해 개조 작업을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냥 제가 해온 일,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매일 해온 일이 수년, 수십 년이 되고 세대를 이어 수백년이 되면 새로운 것을 넘어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될 겁니다. 시간이란 개념이 무색해지는 것이죠. 지금 저의 삶과 일처럼요.”
writerGye Anna, Monica Spezia editor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Michael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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