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within a world
패션 디자이너 부부에게 집을 꾸미는 일은 옷을 재단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부부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탈리아 코모 호숫가의 17세기 고택 카를리아를 독보적 스타일의 보금자리로 변신시켰다.
타페트 카페Tapet Cafe의 실크커튼 사이로 들어온 부드러운 빛이 머무는 거실.
라운지 소파는메리디아니Meridiani 제품. 카펫은 인도에서, 램프와 벨벳체어는 미국 뉴욕에서 구입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자니 베르사체, 조지 클루니, 폴 매카트니….이탈리아 코모 호숫가에 별장을 마련한 셀러브리티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이곳에 사는 것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코모 호숫가는 호수 자체의 수려한 풍경 외에도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중세 시대부터 유럽 귀족과 부호, 예술가의 휴양지로 사랑받은 장소다. 호수가 잘 보이는 명당에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묵직한 역사를 지닌 화려한 빌라가 즐비하다. 카를리아Carlia라 불리는 저택도 그중 하나. 1678년 귀족 안토니오 데 카를리Antonio de Carli가 지은 이 저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을 소유한 1,000m2 규모의 빌라로, 배를 타고 호수를 통해 가야 닿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귀족의 사치와 여유로 치장돼 있던 화려한 저택은 소유자의 도박 빚 때문에 여러 명의 주인을 거쳤고, 심지어 4개로 분할되어 소유자 4명의 취향에 따라 각각의 스타일로 개조되었다.
덴마크 패션 브랜드 데이 비르거 엣 미켈슨을 이끌고 있는 켈드 미켈슨Keld Mikkelsen과 인테리어 브랜드 데이홈을 지휘하는 디자이너 마리안네 브란디Marianne Brandi 부부는 친구의 코모 호숫가 별장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카를리아 저택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들은 해지고 낡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발견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코모 호숫가에 살고 싶어 하지만 저희 부부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없었어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주택을 보자마자 낡은 옷을 수선해 업사이클링하듯 건물에 담긴 옛이야기를 발굴하고,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덧입히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어요. 건물 자체가 욕심났죠.” 역사적인 저택을 덜컥 구입한 부부를 두고 누군가는 노후를 여유롭게 보내기 위한 준비라 했고,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누려본 사람이 가져볼 법한 사치라며 질투했지만 그들의 의도와 목적은 전혀 달랐다. 역사적 건물이 훼손돼 버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앤티크 애호가로서 이탈리아가 가장 번성했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을 통해 그 시대 스타일을 엿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사명감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아요. 상황도, 조건도 좋지 않았지만 이 집을 살려야 했죠. 4명의 주인을 각각 만나 매매를 설득하고 법적 절차도 마무리해야 했어요. 이 건물에 제 이름을 올리기까지 무려 4년이 걸렸죠.” 마리안네 브란디는 휴양, 여유, 힐링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웃었다. “실용과 효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덴마크식이 아니라 상황과 환경에 맞춰서 움직이는 이탈리아식 마인드가 필요했죠.”
건물이 지닌 순수한 민낯
부부는 집을 소유하자마자 집이 품고 있는 역사와 건축 미감을 바탕으로 독창적 스타일을 추가한다는 전제 아래 공사를 시작했다. 첫 번째 미션은 1678년 건물이 지어졌을 때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었다. 부부는 건축가에게 이 집을 거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벗겨내는 일을 맡겼다. 건물외관에 칠해진 레드 컬러 페인트와 장식적 몰딩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천장이었다. 거실, 응접실 등 대형 공간 천장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화려한 벽화가 있었는데, 그림을 벗기고 나니 르네상스 시대로 추정되는 프레스코 벽화 흔적이 발견된 것. 덕분에 역사학자, 복원 전문가가 필요했고 감독 기관의 승인을 받는 등 별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부부의 고집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렇게 건물의 순수한 민낯이 드러나자 5개 방, 5개 욕실, 다양한 사이즈의 거실, 주방, 다이닝 룸 등 전반적인 집 구조가 그려졌다. 부부는 건물뿐만 아니라 야외 정원도 과거의 원형을 되찾고자 했다. 정원 주변을 탐색해 땅에 버려져 있던 중세 시대 돌을 찾아 고전적인 철문과 어우러진 잔디 정원 입구를 만들고, 조경 전문가를 불러 대칭적 형태와 기하학적 디자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을 조성했다. 이로써 언덕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집은 어느 공간에서든 알프스산맥, 코모 호수, 단아한 정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건물의 시간을 되짚어가는 복원 과정과 더불어 거주지를 위한 기본 공사가 이어졌다.
“코모 호숫가의 집들은 대부분 여름 한 철 지내는 별장으로 난방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곳이 많아요. 이곳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방으로 뚫려 있는 커다란 발코니 창은 경이로운 풍경을 선사하는 한편, 겨울의 매서운 찬 바람도 통과시키죠. 별장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이 집에서 사계절을 지내야 하는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난방, 전기, 배관 공사였어요.” 창문 크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창 안팎으로 우드 도어 또는 슬라이드 도어를 설치해 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보온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벽은 마감재를 추가해 두꺼워졌고, 바닥에는 앤티크 카펫을 깔았다.
가장 오랜 시간 공들인 곳은 주방이다. 흑백 컬러 대비를 테마로 덴마크 스타일리스트 로테 밍크Lotte Mink와 함께 수납장부터 키친 시스템 가구까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 벽에는 그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을 알아본 지인들이 선물해준 그림이 가득 걸려 있다. 중앙에 배치한 한스 J. 베그네르Hans J. Wegner의 위시본 체어와 프랑스에서 구입한 접이식 테이블은 식탁이었다가 책상 또는 바 테이블로 변신한다.
“호수 풍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밤이 되면 모두 이곳에 모여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죠.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의 무라노 램프가 별빛처럼 공간을 환히 비춰줍니다.” 자연 풍경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는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린, 베이지, 그레이
등 차분한 컬러 벽지로 마감하고 곳곳에 식물을 두었다. 반면 탁 트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에는 창문마다 의자를 배치해 마음껏 자연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삶을 응원하는 모녀
마리안네 브란디와 딸 아밀리 브란디 미켈슨.
수집이 창조가 될 때
가장 오랜 시간 공들인 곳은 주방이다. 흑백 컬러 대비를 테마로 덴마크 스타일리스트 로테 밍크Lotte Mink와 함께 수납장부터 키친 시스템 가구까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 벽에는 그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을 알아본 지인들이 선물해준 그림이 가득 걸려 있다. 중앙에 배치한 한스 J. 베그네르Hans J. Wegner의 위시본 체어와 프랑스에서 구입한 접이식 테이블은 식탁이었다가 책상 또는 바 테이블로 변신한다. “호수 풍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밤이 되면 모두 이곳에 모여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죠.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CarloScarpa의 무라노 램프가 별빛처럼 공간을 환히 비춰줍니다.” 자연 풍경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는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린, 베이지, 그레이 등 차분한 컬러 벽지로 마감하고 곳곳에 식물을 두었다. 반면 탁 트인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에는 창문마다 의자를 배치해 마음껏 자연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 이 집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건물 자체의 고전적 스타일이나 규모가 주는 웅장함보다 부부의 취향과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가구, 그림, 소품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부부의 수집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부에게 수집은 투자나 취미가 아니다. 그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수집한다. 그것도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일상의 물건, 예를 들어 민속 의상, 신발, 목걸이, 주방 도구 같은 것을 수집한다. “쓸모가 있어서 모으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유달리 사로잡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한 가지 물건만 봐서는 모르지만 모은 물건을 나열해놓고 보면 공통점이 보여요. 연결 고리를 구체적으로 찾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저희의 취향을 깨닫고 동시에 타인의 취향을 배우게 되죠.” 복도에 놓인 장식장에 가득 차 있는 화이트 컬러 세라믹 항아리 컬렉션도 수집 목록 중 하나.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수집한 항아리는 신기하게도 비슷비슷하다. “왜 이런 모양일까 생각하면 그 나라 사람들 삶의 습관과 문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더군요. 이처럼 수집이란 행위를 통해 스타일, 시대, 문화, 사고방식 등을 깊이 연구하게 됩니다. 저에게 수집이란 인문학 고전과 다름없어요.” 남편 켈드 미켈슨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악기다. 옷보다 드럼, 기타 등 악기가 더 많고 악기들은 맞춤 제작한 유리 캐비닛에 고이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앤티크 수집품을 중심으로 꾸며볼까 생각했는데, 남편이 그건 너무 뻔한 그림이라 하더군요. 반전과 대비가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시대와 스타일을 뒤틀기로 했죠.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도, 이탈리아 스타일도 아닌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독창적 스타일 말이죠.” 컨템퍼러리 예술 작품, 모던한 디자인 가구와 조명, 바로크 스타일의 앤티크 테이블, 고전 스타일의 예술 조각품이 함께하는 현관이 대표적이다. 모든 공간에는 앤티크와 컨템퍼러리 제품이 균형을 이루면서 다른 국가, 시대,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다.
꿈을 이루면서 부부의 삶도 달라졌다. 인도 뉴델리에 사는 딸 부부가 수시로 찾아오고, 덴마크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지중해 햇볕을 만끽하기 위해 자주 방문하니 집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인다. 집 안보다 야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늘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원에서 자라는 오렌지, 레몬, 석류, 무화과, 올리브를 직접 수확해서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매년 80리터 이상 얻을 수 있는 올리브 오일은 맛과 품질이 최고죠.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저희 부부에게 이런 자급자족 생활은 축복 같아요.” 온화한 지중해 햇볕, 풍성한 먹을거리, 입이 쩍 벌어지는 자연 풍경…. 코모 호숫가에서의 삶은 조금은 느리게, 적당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줬지만 마리안네 브란디는 쉼표 대신 느낌표를 택했다. 빌라 이름을 따서 의류 브랜드 라 카를리아La Carlia를 론칭한 것. 라 카를리아는 인도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패브릭으로 만든 의류, 소품 등을 소개하는 브랜드다. 재스민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1층 건물 한쪽이 라 카를리아 디자인 스튜디오. 마리안네 브란디는 이곳에서 직접 옷을 만들고, 모델이 되어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초대해 패션쇼를 연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여유와 휴식을 떠올리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일과 삶이 조화로울 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죠. 코모 호수가 제게 가르쳐준 교훈이랍니다.”
거실은 물론 침실과 주방, 집 안의 모든 공간에서 아름다운 호수 풍광을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다.
정원에는 대칭적 형태와 기하학적 디자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writer Gye Ann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 Birgitta Wolfgang Bjørnv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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