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느낌을 주는 거실 풍경. 페인트 벽이 천장이나 바닥과 분리되어 보이지 않게 톤과 컬러가 비슷한 커튼, 침구 등을 배치해 연결했다. 스웨덴에서 구입한 1950년대 암체어와 러그를 다른 방향으로 배치해 공간을 2개로 분리했다.
프랑스 파리 에콜 뒤 루브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디자인 복원 전문 학위를 받은 캐럴 데콤Carole Decombe은 앤티크 딜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을 배워가면서 자신만의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점점 선명해졌고, 컬렉터 입장이 되어 직접 작품을 구입하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의 간격을 서서히 좁혀나가던 그는 2007년 앤티크 거리로 유명한 카레 리브 고슈Carre´ Rive Gauche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오픈한다. 18 세기부터 20세기 인테리어 장식 예술품을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제품을 주로 소개하는 갤러리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2012년 규모를 확대해 파리 생제르맹데프레Saint Germain des Pre´s로 이전하고 더 나아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멜로즈 애비뉴Melrose Avenue까지 진출하게 된다. “로스앤젤레스에 갤러리를 오픈하면서 두 집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죠. 어느 날 아트 페어에 참석하기 위해 짐을 싸는데 문득 ‘굳이 일터와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독립하면서 도시에 살 이유가 없어졌고, 열정이 있을 때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찾아 실천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대와 스타일의 크로스오버
캐럴 데콤과 남편이 향한 곳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이었다. 매년 여름 휴가를 보냈던 터라 다른 어느 도시보다 친숙했고 한 번도 지루함을 느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부는 화가 세잔이 태어난 엑상프로방스, 미로 같은 중세 마을 카르카손,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 고흐가 사랑한 아를 등 마음을 흔들어놓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 달씩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제2 의 고향을 찾아 3년간 생활 여행자로 살던 그들을 멈춰 세운 곳은 라벤더 향기 속에 올리브나무 열매가 단단하게 영글어가는 평화로운 마을 뤼베롱Luberon이었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18세기 농가 주택을 발견했죠. 입구부터 지중해 바람에 실려온 달큼한 라벤더 향기가 났어요. 미풍은 꽉 닫혔던 어린 시절 추억과 자유로운 감성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죠.” 무엇보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18세기 건축물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위엄 있는 바로크 장식보다 아기자기하면서 섬세한 로코코 장식이 환영받았고, 동서양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스타일이 교차하고 충돌했다. 또 정치, 문화, 예술 전반의 크로스오버 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480m2 규모의 건물과 10,000m2의 야외 정원이 있는, 프랑스어로 ‘마스mas’라 불리는 농가 주택. 대들보 위에 새긴 1787년이란 숫자를 발견한 그녀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집을 개조하겠다고 결심했다 .
돌 자체로 완성되는 집
프로방스 건축물은 주변에서 구한 돌을 이용해 바닥에서 천장까지 구조물을 세운 뒤 화이트 또는 크림 컬러 스투코stucco로 외관을 정리하고 레드 컬러 벽돌로 지붕을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녀가 점찍은 농가 주택도 프로방스 특유의 건축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반 이상 허물어진 상태였다. 디자인 복원 전문 학위가 있는 그녀는 그 나름의 지식과 노하우를 활용해 외부는 18세기 시대로 회귀하는 한편 내부에는 현대식 편의 시설을 갖추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복원의 첫째는 구조와 디자인이 아니라 자재 그 자체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앤티크 석재를 취급하는 장 샤보Jean Chabaud를 찾아 18세기 시대 건물의 잔해에서 나온 다양한 돌과 타일을 구입했죠.” 부드러워서 다양한 모양으로 조각할 수 있고 높은 경도와 내구성을 갖춰 건축 외장재로 널리 쓰인 18세기 부르고뉴 돌과 타일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세월이 만든 투박한 컬러와 은은한 질감을 지니고 있던 돌은 어떤 페인트 컬러보다, 어떤 섬세한 문양보다 아름다웠다. “모난 돌을 살펴보면서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 자체로만 인테리어가 완성되는 집, 자연 그대로의 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침실 한쪽에 마련된 미니
살롱. 필립 위렐Philippe
Hurel의 그레이 패브릭 소파와
오크Ochre의 천장 조명으로
현대적 분위기를 강조했다.
건축 용어로 ‘볼트’라 불리는, 반원형 모양 천장 지붕을 구현했다. 볼트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18세기 교회 예배당 것을 옮겨 왔다.
볼트 천장과 기둥은 본래 건물이 존재했던 18세기에 흔히 사용한 건축 요소다.
돌계단 옆에서 포즈를 취한 캐럴 데콤. 계단 아래에는 18세기 프랑스 비오Biot 지역에서 오일을 저장하는 데 사용한 전통 도자기가 놓여 있다.
불완전한 아름다움
그녀는 부르고뉴 타일을 현관과 계단 장식에 활용하고, 앤티크 테라코타 타일로 거실과 침실 바닥을 마무리했다. 거실 벽난로는 고대 돌을 이용해 장식장으로 개조하고, 침실에는 18세기의 특징적 문양이 돋보이는 벽난로를 두었다. 그렇게 비바람에 씻기고 이지러진 돌을 먼저 정리한 뒤, 남은 자리에는 톤과 컬러가 돌과 비슷한 파로 앤드 볼Farrow and Ball의 천연 페인트로 마감했다. 페인트를 칠한 벽이 천장이나 바닥과 분리되어 보이지 않게 비슷한 톤과 컬러의 커튼, 침구, 쿠션 등을 배치한 점도 그녀만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 시간을 머금은 돌 자체의 매력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곳은 부엌과 다이닝 룸이다. 그녀는 건축 용어로 볼트vault라 불리는, 반원형 천장 지붕을 구현했다. 볼트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은 18세기 교회 예배당 것을 옮겨 왔다. “고대 로마 시대, 각종 저장 시설을 지하에 짓기 위해 볼트 천장이 생겨났어요. 18세기까지 번성하다 19세기 콘크리트, 철강 소재가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죠.” 이처럼 그녀는 18세기 건축 자재를 어렵게 구해 활용하는 것은 물론, 가공과 연출 또한 그 시대 방식대로 따르고자 했다. “그렇게 돌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니 자연스럽게 집이 단정해지면서 현대적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돌집은 햇빛 변화에 따라 다양한 광채를 발하고 가구와 소품을 돋보이게 하죠.”
이 집에서 오래된 돌만큼 눈에 띄는 건축자재가 나무다. 깊은 주름이 멋스러운 고재古材는 천장을 꾸미는 데 사용했다. “갈비뼈 모양의 서까래 이음매가 매끄럽지 못한데, 이는 당시 일반인이 마당에 있던 뽕나무를 잘라 투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제 눈에는 그렇게 울퉁불퉁하고 주먹구구식처럼 보이는 점이 더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보여요. 그래서 재건하면서 불완전한 허점을 일부러 드러내려 노력했어요.”
정원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캐럴 데콤만의 건축 논리는 외부에서도 이어진다. 18세기 건축의 핵심은 건축물 자체보다 외부 자연을 연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고, 건축물만큼 정원을 개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녀는 프로방스 토속 식물과 프랑스 전통 정원을 이해하는 경험 많은 전문가를 찾았다. “유명 디자이너이자 사업가 피에르 베르게Pierre Berge´, 자크 그랑주Jacques Grange 등의 정원을 디자인한 조경 아티스트 미셸 세미니Michel Semini를 만났어요. 로즈메리, 라벤더, 세이지, 재스민, 등나무, 장미 등 향기를 피워 올리는 각종 꽃과 잣나무, 뽕나무, 올리브나무 등을 자유롭게 사용해 정원을 꾸미는 데 능숙한 사람으로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남다른 재능이 있죠.” 뜨거운 여름을 식혀주는 야외 수영장과 건물 사이, 야생 정원이라 이름 붙인 곳에는 아티스트 세잔의 목가적 풍경화가 중첩된다. 집 안 어느 곳에서든 정원이 보이고 은은한 향기가 전해진다. “눈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정원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겠다 싶었죠. 그래서 1층 곳곳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내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수영장 옆, 거실 옆, 건물 뒤편 등 건물과 이어지는 곳에는 야외 테라스가 있다. 그중 자갈로 바닥을 다지고 퍼걸러를 세운 곳에는 10명 이상이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을 두었다.
현관 복도에는 고요한 창밖 풍경을 마주한 것 같은 미국 아티스트 마이클 말로Michael Marlow의 작품과
영국 디자이너 필립 위렐의 모던한 벤치를 배치해 공간 속 공간을 연출했다.
필립 위렐의 데이 베드, 크리스티앙 리에거Christian Liaigre의 블랙 컬러 스툴, 스웨덴에서 구한 빈티지 거울 등으로 조화롭게 연출한 현관.
시선을 붙잡는 사진은 디아나 루이Diane Lui의 작품으로 갤러리 캐럴 데콤에서 소개한다.
뜨거운 여름날을 위한 지중해 바다처럼 맑은 20m 길이 수영장. 의자는 텍토나Tectona 제품.
정원에는 대칭적 형태와 기하학적 디자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간 속 공간, 레이어 법칙
파리, 로스앤젤레스에 갤러리를 둔 전문 갤러리스트이자 20 대부터 가구, 디자인 작품을 수집한 열정적 컬렉터인 만큼 진귀한 보물 이야기가 쏟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대화는 구조와 공간에 집중되었다. 아무리 멋진 소품과 가구를 소장했다고 해도 배경과 궁합을 맞추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설명과 함께. 그녀는 하나의 공간 안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레이어 법칙’을 바탕으로 18세기 앤티크와 21세기 컨템퍼러리 작품을 믹스 매치하는 재주를 풀어놓았다. 예를 들어 거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2개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한쪽에는 소파와 의자가 커피 테이블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대형 창문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창밖 정원으로 시선을 둘 수 있는 소파로 간다. 침실 안에도 공간 속 공간, 미니 살롱이 존재한다. 침실 쪽은 앤티크 가구로 채우고 미니 살롱은 현대 제품을 배치하는 반전을 만들었다. “데이 베드와 체어가 놓인 곳은 ‘공간 속 공간’이라 볼 수 있어요. 이렇게 공간을 촘촘하게 분리하는 식으로 가구와 소품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리도록 하는 것이 저만의 비밀스러운 트릭이죠.”
삶을 변화시키는 공간
그녀의 말처럼 공간마다 은밀하게 숨겨놓은 쉼표 같은 곳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컬렉션에 시선이 쏠린다. 갤러리를 통해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 클레먼츠 디자인Clements Design, 후안 몬토야Juan Montoya 등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있지만 이곳에는 그녀 인생에 결정적 영감을 준 작품만 엄선했다. 프랑스·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디아나 루이Diana Lui의 사진 작품, 거실 공간을 돋보이게 하는 니암 베리Niamh Barry의 설치 조명 등이다. “18세기 앤티크 가구 중에서 정교한 디테일이 살아 있는 가구들을 골랐어요. 게스트 룸에 있는 위제스Uze´s 앤티크 옷장처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구가 대표적이죠. 처음 스칸디나비아 앤티크 소품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이유인데,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17세기부터 가구에 그림을 그렸어요.” 이처럼 캐럴 데콤은 유명 디자이너나 브랜드보다 나라와 시대의 고유한 특색을 먼저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는 경험과 노하우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맥을 제대로 짚는 지식과 감각을 지녔기 때문이다.
“제가 모두 관여한 집인 만큼 어느 한 곳 마음에 들지 않는 공간이 없어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 바람, 햇빛 모두 제가 꿈꾸었던 느낌과 감동 그대로죠.” 그녀는 이곳에 이사 온 후 아늑한 집이 주는 안정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파리, 로스앤젤레스에 살 때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뤼베롱에 정착한 뒤로는 여행을 주저하게 되었다고. 오히려 친척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결혼을 앞둔 장남에게도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라벤더 밭이 바이올렛 컬러로 물드는 때에 말이죠. 이 집은 그렇게 조금씩 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어요.”
writerGye Ann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 Birgitta Wolfgang Bjørnvad
coordinator Julia Mincarell
최근 본 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