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름 키퍼가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함께 독일관 작가로 참여한 1980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을 살펴보자. 히틀러를 조롱한 바젤리츠의 조각 작품 ‘조각을 위한 습작(Model for a Sculpture)’(1980)과 함께 키퍼가 출품한 목판화 ‘처세술의 여정들:에르만 전투(Paths of WorldlyWisdom:Hermanns Battle)’는 “파시즘과 국수주의의 이미지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평가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에르만 전투는 6세기 게르만족의 족장 에르만이 게르마니아를 흡수하려는 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8~19세기 독일 국수주의자들은 이 전투를 자신들의 순수 혈통과 독립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 사건으로 추앙했다. 나아가 이 전투의 상징성은 나치의 제3제국 시기에는 이른바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월성을 입증하며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걸린 초상화처럼 에르만을 비롯한 독일의 지식인, 예술가, 발명가, 기업가, 심지어는 나치의 군사 지도자까지 등장하는 키퍼의 작업을 두고 독일성에 대한 찬양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사실을 보자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독일 분단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이 중첩된 키퍼의 목판화는 ‘독일 과거의 영웅화’와 거리가 먼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미술계에 새로운 주류로 떠오른 독일 현대미술은 미국 미술 비평가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키퍼의 작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정립된 국제 정치 판도에서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가 새로운 독일회화 작가들의 포지션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미화’, ‘과거로의 퇴행’이라는 일련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키퍼는 자신의 작업은 독일의 과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라 설명했다. 키퍼의 주장은 이렇다. 과거를 진실되게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모든 재현 방식은 낭만화의 위험성을 숙명적으로 품고 있다. 따라서 역사책의 서술처럼 제3자의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기록-서사의 방식을 믿는 것 자체가 미신의 시작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그가 독일의 불행을 다루는 데 나치의 파괴적 행위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데 대한 답변이 되어준다.
   작가는 소설, 시, 예술 작품, 건축, 전래되는 이야기, 미신, 성경, 유대 전통의 <카발라Kabbalah> 경전 등 시각-물질 문화라는 렌즈로 은유화된 과거를 바라본다. 대표적인 예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다룬 작품으로 알려진 1981년 작 ‘너의 금발 머리카락, 마가레테’를 들 수 있다. 어두운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기다란 밀이 무성한 밀밭을 묘사한 이 작품은 언뜻 보면 한 여성의 금발을 찬양하는 내용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너의 금발 머리카락, 마가레테’가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이 1945년에 발표한 서정시 ‘죽음의 푸가(Todesfuge)’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점과 파울 첼란 역시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집단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과 고문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시의 한구절도 쉬이 지나칠 수 없다. ‘죽음의 푸가’는 “우리가 매일 마시는 검은우유”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매일 수용소의 유독가스를 마시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빗댄 것이다. 키퍼가 변형한 구절은 마치 첼란이 마가레테와 술람미Shulamite, 두 여성의 환영을 보는 듯 읊는 구절이다. “그대 금발의 마가레테여, 그대 잿빛 머리 술람미여.” 하지만 키퍼는 직접적으로 술람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캔버스에 지푸라기로 표현된 금발의 마가레테만 보일 뿐이다. 캔버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성한 금빛 밀이 불에 그을린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까만 재는 술람미를 상징하며, 화면 중앙에 놓인 알파벳 ‘Magarethe’를 표기한다. 작품에서 키퍼가 인용한 구절은 구약의 <아가서>에서 기원한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을 화자로 삼아 사랑을 찬미하는 6장 13절이다. “술람미의 아가씨야, 눈부신 너의 모습을 우리가 좀 볼 수 있게 돌아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