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오래된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에서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말끔한 원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베니스의 풍경 속에서 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베니스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 중 하나인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1817년 개관한 이래로 중세 후기부터 모더니즘 이전까지의 작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다. 그간 이곳에서 유럽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동시대 미술 작가를 초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마리오 메르츠(2015), 필립 거스턴(2017), 게오르크 바젤리츠(2019)에 이어 네 번째 동시대 작가로 아니쉬 카푸어를 초청해 2022년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일정에 맞춰 회고전을 열었다. 이번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은 과거 미술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사용됐던 이곳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기획한 동시대 미술 프로젝트다.
인도계 영국 작가 아니쉬 카푸어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하늘 거울(Sky Mirror)’(2018)은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중정에 놓여 있다. 언뜻 안테나나 위성처럼 안이 움푹 들어간 원형 작품은 거울 면이 있어 청명한 하늘을 비춘다. 하늘의 모습을 땅에서 가까운 곳으로, 기념비처럼 옮겨 온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세계가 반대로 뒤집히는 것만 같고, 현기증마저 느껴진다. 카푸어는 이렇게 인류를 둘러싼 세계를 의식하면서 생명과 삶을 질문하는 작품을 많이 만들어왔다. 특히 그는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물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을 만든다. 물리적 에너지의 이동이나 성질을 단번에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인류의 감정이나 영적인 것을 함께 다루고 있다.
가장 어두운 물질에 대한 고집
이번 전시에서 카푸어는 안료를 사용한 초기 조각 작품 ‘1천 개의 이름(1000 Names)’과 ‘보이드Void’ 시리즈를 포함한 60여 점의 작품을 선 보였다. 특히 이 전시에서 최초로 반타블랙을 사용한 조각 작품을 소개했다. 카푸어는 이 ‘보이드’ 시리즈를 제작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물질’이라는 안료 반타블랙의 독점 사용권을 얻어냈다. 2014년 영국의 회사 서레이 나노시스템Surrey NanoSystems에서 개발한 반타블랙은 가시광선의 99.965%를 흡수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매우 깊은 검은색을 띨 뿐만 아니라 빛을 받은 모든 각도에서 돌려 봐도
색을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안료는 보통 물감처럼 튜브를 짜거나 피그먼트처럼 가루를 얹는 걸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 열을 가하는 등 복잡한 후공정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는 주로 산업용으로 빛의 반사를 막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데, 아니쉬 카푸어는 이를 작품 제작에 사용하기 위해 이 안료의 개발 과정에서부터 거액을 주고 독점 사용권을 구매했다(그래서 다른 어떤 아티스트도 이 안료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실체와 존재에 대한 유추
전시장 한쪽 공간에는 이 반타블랙을 사용한 작은 작품들이 어느 정도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전시장 사진을 보면 이는 검은색 색종이를 붙여놓은 듯하기도 하고, 일종의 색면 추상 작품을 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색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는 색면 추상 작품과 달리아니쉬 카푸어의 이 작품들에서는 어떤 색도 찾을 수 없다. 반타블랙 안료를 얹은 작은 조각 시리즈 ‘논오브젝트 블랙Non-Object Black’을 담은 이 공간을 그는 ‘작업실(Studio)’(2020)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다. 이곳은 관객에게 작품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일종의 프로토타입과 함께 여러 방식의 실험을 소개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전시장 안을 거닐 때 전시장 한쪽 벽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사이즈로도, 안료 가루의 바스러지는 질감을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도 제시되는데, 크기와 놓인 방식에 따라 관객들은 이 작품을 완전히 다르게 감각하게 된다. 또 이 새까만 작품들의 겉면은 작품의 안과 밖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작품들의 실체는 명백히 존재하지만 자세히 볼수록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점차 사라진다. 안료로 덮인 곳의 부피나 두께, 질감 등을 파악하기 어려워 안료가 발리지 않은 면과의 접합을 보면서 이것이 만든 외곽선 형태만 유추할 뿐이다. 이러한 특징은 카푸어가 그동안 천착해온 네거티브 스페이스에 대한 탐구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주로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나는 카푸어의 작품은 단번에 눈에 들어오거나 손에 잡히지 않거나 발을 디딜 수 없는 공간을 다룬다. 말할 수 없이 깊은 어둠을 통해 있음과 없음, 안과 밖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질문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그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보이드 Void’라 부른다. 이 작품들은 언뜻 구멍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카푸어에게 이 작품은 비어 있는 상태로 채워진 공간이다. 카푸어는 명백한 비움을 보여주는 이 상태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공간의 상태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