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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宮에 午正이 웁니다
2020/3 • ISSUE 23
editorMoon JinheewriterKim Jangun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16-IV-70 #166(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연작)’, 1970, 코튼에 유채, 236x172cm
김환기/환기미술관
駱駝낙타 한 마리가 한 마리의 駱駝를 쫓고 외로운 白孔雀백공작이 나래 끝에 기지개를 치면 풍경 처마 끝에서 까무라칩니다. 古宮고궁에 午正오정이 웁니다. 바나나 溫室온실에서 뚝 떨어지고 煙焰연염한 蓮연 한껏 情熱정열을 머금었고 뻐금뻐금 금붕어 물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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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터질 듯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환기, ‘麗春譜여춘보 - 苑화’, 〈여성〉 5-5, 1940년 5월호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
위 시는 김환기(1913~1974)가 아름다운 어느 봄날의 풍경과 정서를 표현한 글이다. 글 내용을 보면, 아마 그는 창경원이 되어버린 창경궁에서 이국적인 동물을 보고, 정오를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대온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떨어진 바나나와 강렬하게 핀 연꽃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아름다운 봄날에 대한 자신의 정서를 ‘툭 터질듯한’ 어느 날로 표현하고 있다.
언뜻 문체에서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시문학파의 영향을 깊이 느낄 수 있는데, 김환기가 정지용 같은 문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단순히 미술과 문학의 만남과 같은 피상적 평가로 폄하할 수는 없다. 근대라는 새로운 문명 속에서 대상과 사물에 대한 심미적 인식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미지로서 그것을 재현하고자 했던 당시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열망이 서로 만나고 공유되었던 시대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궁에서 정오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궁은 더 이상 고궁이 아니고 유원지로 변했지만, 한낮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으며, 모든 것이 터질 듯한 봄의 시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작가로서 김환기는 늘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망과 도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 선구적 화가 중 한 명이다.
김환기의 예술 세계는 그가 머문 장소에 따라 나뉘는 경향이 있다.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작가로 데뷔한 도쿄 시기(1933~1937), 작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서울로 옮겨온 1차 서울 시기(1937~1956), 다시 작가로서 세계와 대면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한 파리 시기(1956~1959) 그리고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온 2차 서울 시기(1956~1963),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후, 귀국하지 않고 뉴욕으로 건너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한 뉴욕 시기(1963~1974)가 그것이다. 도쿄-서울-파리-서울-뉴욕으로 이어지는 작가로서 그의 여정은 단순한 도시로 간 이동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접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정과 추상에 대한 열망, 그리고 보편적 미술에 대한 자신의 도전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늘 한국이라는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을 탐구하면서도 언제나 코즈모폴리턴으로서 보편적 예술 세계에 도전했다.
‘산월’, 1958, 캔버스에 유채, 130x10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