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스트 카멜 메누르의
예술이 깃든 집
카멜 메누르의 집 ‘빌라 카스텔 마레(Villa Castel Mare)’는 예술을 소유하는 방법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한 세기 전 벨 에포크 시대가 꿈꾸었던 풍요와 낙관,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오늘도 이 공간에서 이어지고 있다.
writer Gye Anna, Tiqui Atencio Demirdjian editor Kim Minhyung photographer Jean François Jaussaud
모나코와 맞닿아 있는 프랑스 해안 마을 카프다유(Capd’Ail). 가파른 바위 절벽과 푸른 지중해를 품은 이곳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건축한 벨 에포크 시대의 빌라가 해안을 따라 잔잔한 파도처럼 이어져 있다. 우리에게 벨 에포크는 화려한 장식과 유려한 곡선, 우아한 실루엣과 사교 문화의 시대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이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던 낙관이 자리한다. 그 감각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집이 바로 빌라 카스텔 마레다. 크림빛 파사드와 장식적인 철제 난간, 모자이크 바닥과 오래된 계단,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까지. 이 집은 외형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이 깊이 스며 있다. 창밖으로는 지중해의 햇살이 하루 종일 유영하고, 바다를 향해 열린 창과 테라스 사이로 식물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그 풍경 위로 동시대 미술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오래된 건축과 현재의 시간을 하나의 장면으로 엮어낸다.
매장에서 만나요" 집안 곳곳에 작품이 놓여 있지만,
이는 오래된 집의 정체성 속에
예술이 자연스럽게 머물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
벨 에포크 시대의 귀환
공간의 주인은 프랑스 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갤러리스트이자 컬렉터카멜 메누르(Kamel Mennour)다. 그는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을, 2023년에는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을 받았다.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 메누르(Mennour)에는 40명이 넘는 작가가 소속돼 있으며, 파리의 4개 전시 공간이 중심이 되어 세계적인 갤러리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갤러리의 두꺼운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짙은 녹음 사이로 지중해의 빛이 부서진다. 야자수와 소나무, 덩굴과 붉은 꽃이 길을 만들고, 그 길목에서 스위스 예술가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의 조각 작품 ‘Green Yellow Nun’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오래된 정원에 홀연히 나타난 이 형상은 마치 꿈속의 안내자처럼집 안에 펼쳐질 예술적 풍경을 예고한다. 이곳에서 예술은 벽에 걸린 장식품에 머물지 않는다. 작품들이 계단과 복도, 정원과 수영장을 따라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대화를 나눈다. 아니시 카푸어(Anish Kapoor)의거울은 정원과 하늘, 바다 풍경을 반사하며 공간을 확장시키고, 안 베로니카 얀센스(Ann Veronica Janssens)의 블라인드 작업은 지중해의 햇살을 받아 시간에 따라 다른 빛의 결을 만들어낸다. 수영장에는 이 집에특별히 초대된 매튜 루츠-키노이(Matthew Lutz-Kinoy)의 회화적 흔적이 물빛 아래 또 다른 정원처럼 펼쳐진다.
메누르는 빌라 카스텔 마레의 첫인상을 이렇게 회상한다. “무엇보다 풍경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바다와 빛, 정원과 방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어 자연스럽게 작품에 울림이 있는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개조가 아니라 보존을 선택했다. 현대미술에 걸맞은 분위기로 집을 극적으로 바꾸는 대신, 오래된 건축이 지니고있는 장점을 더욱 강조해 드러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품이 스며들도록 여백을 만들었다. 또한 메누르는 작품들이 건축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도록 집의 건축적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건축적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건물은 지중해를 향해 균형감 있게 펼쳐진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 현관 앞 2개의 이오니아식기둥은 고전적인 품격을 더하고, 건물 곳곳에 남아 있는 장식적 몰딩과난간, 돌출 창은 20세기 초 프랑스 리비에라 특유의 낭만적 분위기를 전한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격자무늬 장식의 높은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앙 홀은 집 전체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며, 곡선으로 이어지는 계단과 복도가 공간에 우아한 흐름을 만든다. 거실과 다이닝 룸은 남쪽으로 길게 열려 있어 하루 종일 지중해의 빛을 받아들이고,연속된 발코니를 통해 실내와 바깥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느방에 있든 바다와 정원, 하늘의 색이 공간 안으로 스며드는 구조다.
정원 역시 빌라 카스텔 마레의 중요한 일부다. 울창한 식생 사이로 이어지는 계단과 산책로, 인공 암석과 작은 다리, 벤치와 정원 문은 오래된 유럽 정원과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정원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수영장과 바다가 하나의 풍경처럼 연결되는데, 이는 당시 리비에라 별장이 추구한 여유롭고 낭만적인 생활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족, 그리고 삶 속에 예술이 스미는 방식
“집 안팎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가득하지만 이곳은 전시 공간도, 컬렉터의 개인 공간도 아닙니다. 저희 가족의 집이자 우리의 시간이 머무는 곳이죠. 응접실과 침실, 정원과 수영장에 작품이 놓여 있지만, 이는 오래된 집의 정체성을 지키며 예술을 그 안에 자연스럽게 머물게 하려는 방법일 뿐입니다. 이 집의 아름다움과 역사, 그리고 풍경을 향해 열린 구조는 예술이 특별한 울림을 얻게 해줍니다.” 그는 스물세 살에 아내 아니카(Annika)를 만났고, 함께 다섯 자녀를 두고 있다. 메누르는 어린 시절 외롭게 성장한 경험 때문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업이 확장되고 국제 미술계의 변화 속도가 빨라져도 파리와 런던 너머로 작업을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는 이유 역시 가족과의 삶을 위한 균형 때문이다.
삶 속에 예술을 자연스럽게 삽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품과 건 축 그리고 풍경 사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빌라 카스텔 마레는 그 자체로 풍부한 대화를 품고 있습니다. 그 대화는 이 집의 절충적 건축양식과 현대미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며, 가까이에 있는 지중해의 리듬과 분위기 속에서 완성됩니다.” 빌라 카스텔 마레에서 작품은 흰 벽 위에 고립되지 않는다. 모자이크 바닥의 패턴, 벽난로 장식, 창밖의 수평선, 정원의 그림자, 바다의 색과 함께 읽힌다. 작품이 집을 설명하고, 집이 다시 작품을 해석한다.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엄격한 형식 언어, 우고 론디노네의 시적인 색채와 형상, 아니시 카푸어의 거울 같은 깊이는 오래된 장식과 충돌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다시 보게 만든다. 정원은 자연과 작품이 직접 마주하는 장소다. 야자수와 소나무, 무성한 식생 사이에 놓인 조각들은 빛과 바람,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다. 정원에는 좀 더 조각적인 성격의 작품들이 놓였다. 돌이나 청동처럼 자연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그중 의자 다리 위에 거대한 돌이 놓여 있는, 알리시아 크바데(Alicja Kwade)의 작품 ‘Sie`ge du Monde’는 식물과 바다 사이에 놓여 자연과 예술의 경계를 흐린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유물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시선으로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이 작품은 정원에서 걷는 속도와 시선의 방향에 따라 문득 나타났다가 다시 식물과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수영장에서 펼쳐진다. 독일계 미국 작가 매튜 루츠-키노이는 빌라 카스텔 마레를 위해 특별히 ‘A Pool for Paul Thek on Ponza’(2021)를 제작했다. 그는 비어 있는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 며칠 동안 바닥과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벽면을 따라 펼쳐지는 커다란 분홍색 꽃들은 선명한 푸른색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마치 수면 아래 또 다른 정원이 자리한 듯한 장면이다.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던 수영장은 그렇게 하나의 몰입형 회화가 되었다. 물이 차오르면 그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빛과 겹쳐져 또 다른 깊이를 얻는다. 이 작업은 빌라 카스텔 마레가 지닌 지중해적 정신, 즉 빛과 물, 색채와 여름의 감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테이블 위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이닝 룸.
지중해 풍경이 펼쳐지는 거실에는 벽 중앙에 걸린 샘 프랜시스의 회화, 그리고 사이즈 테이블에 놓인 카미유 앙로의 조각 작품이 어우러진다.
"작가를 선택할 때는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발견하는지 살펴봅니다.
서로 다른 환경속의 작가들이 조화로운
대화의 장을 마련했으면 해요."
매장에서 만나요갤러리 메누르의 탄생
카멜 메누르의 삶은 자신이 만든 공간만큼이나 강한 서사를 지닌다. 그는 알제리에서 태어나 두 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후 파리 벨빌의 노동자 계층 지역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페인트공이자 장식공이었고 어머니는 청소 일을 했다. 이혼 후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 들어가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곧 자신을 진정으로 사로잡은 것은 숫자와 시장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사과정 마지막 해에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미술 서적을 더 많이 읽었다고 회상한다. 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해 카라바조(Caravaggio)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미술사를 흡수하듯 읽어 내려갔다.
물론 늦게 입문한 미술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파리 미술계는 그에게 낯설고 닫힌 세계였다. 인맥도 자본도 멘토도 없었다. 그는 쇼핑몰에서 판화를 팔며 버텼고, 모든 아트 페어를 찾아다녔지만 언제나 관람객에 머물렀다. 1999년 라틴 지구의 뤼 마자린(Rue Mazarine)에 작은 임대 공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기회를 붙잡았다. 어머니와 형제가 임차권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첫 갤러리를 열었다. 처음에는 사진을 전문으로 했는데 당시 파리는 지금처럼 사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도시가 아니었지만, 그는 바로 그 틈에서 가능성을 엿보았다. 결정적 전환점은 2005년 무렵 찾아왔다. 다니엘 뷔랑이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갤러리에 합류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졌다. 메누르는 비즈니스석에 앉은 그를 찾아가 말했다. “제가 당신이라면 저 같은 젊은 사람과 운명을 함께할 겁니다. 당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니까요.” 2주 뒤 뷔랑은 그에게 전화했다. 이 만남은 그의 갤러리가 젊은 작가와 거장을 함께 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큰 발걸음이 되었다.
갤러리스트, 경계를 넘어 연결하는 사람
오늘날 메누르는 굵직한 이름의 아티스트 40여 명과 재단을 대표한다. 다니엘 뷔랑, 아니시 카푸어, 이우환, 우고 론디노네, 필립 파레노 (Philippe Parreno), 황융핑(Huang Yong Ping), 알리시아 크바데, 카미유 앙로(Camille Henrot), 모하메드 부루이사(Mohamed Bourouissa) 등 서로 다른 세대와 배경의 작가들이 그가 말하는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저는 작가를 선택할 때 작가가 무엇에 집착하는지, 세상에 무엇을 주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우리 시대의 무엇을 목격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갤러리란 서로 다른 시선이 모여 세상을 탐구하는 장소죠. 그래서 특정한 유파나 하나의 미학적 노선을 만들지 않고 서로 다른 세대와 지역, 감각을 가진 작가들이 각자의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그에게 한국은 과거의 우연한 만남이 시작된 장소이자 현재의 미술적 교류가 확장되는 살아 있는 현장이다. 그의 행보는 앞으로도 여러 도시로 나아갈 것이다. 2026년 9월 초 프리즈 서울 참가에 이어 10월에는 아트 바젤 파리를 중심으로 여러 프로젝트가 이어질 예정이다.
다시 빌라 카스텔 마레로 돌아오면, 이 집은 메누르의 삶과 철학을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 장소처럼 보인다. 알제리에서 파리로, 판화 판매에서 세계적 갤러리로, 작은 사진 갤러리에서 동시대 미술의 국제적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여정은 언제나 경계를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 온 것은 요란한 선언이 아닌 조용한 연결에 가깝다. 젊은 작가와 거장, 가족과 일상, 오래된 건축과 현대미술, 지중해 풍경과 예술을 이어온 시간들. 빌라 카스텔 마레는 그 모든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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