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로 재탄생한 고전
리히텐슈타인의 기계적 회화는 놀랍도록 인간적이다. 그가 만든 점 하나하나, 그 점들 사이 간격에는 ‘예술이 여전히 손으로 만들어지는 일’이라는 고전적 믿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writer Kim Jaeseok 아트 저널리스트 editorKim Minhyung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은 흔히 ‘만화의 화가’로 불린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입술, 푸르거나 노란 머리칼, 점점이 박힌 도트 무늬로 이루어진 여성상은 팝아트의 상징이 되었고, 대중 소비사회의 시각언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로 통한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대중문화 이미지를 전유한 팝아티스트로만 보는 관점은 그가 평생에 펼친 예술 여정의 깊이를 음미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1960년대 초반부터 고전 회화를 ‘팝아트’의 시각언어로 재해석해갔다. 그는 세잔, 모네, 피카소, 마티스 등 서구 근현대 회화의 주요 작가들을 반복적으로 다루었고, 후기에는 중국 산수화의 시각 체계까지 탐구했다. 그의 미술사 재해석 시리즈는 단순 한 패러디나 오마주가 아니라, 회화의 구조와 언어를 분석하고 재조립 해 ‘회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일종의 시각 실험이었다.
양식의 언어가 또 다른 양식으로
사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나 광고 이미지를 옮겨 그리면서도 그 속에서 고전 회화의 형식을 차용했다. 그의 목적은 뚜렷했다. “만화는 본래 소통을 위해 만든 겁니다. 거의 같은 형식으로도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어요.” 작가가 38세에 제작한 ‘Look Mickey’(1961)는 팝아트의 등장을 알리는 역사적 작품이다. 아들의 방에 미키마우스를 프로젝터로 투사해 그린 적이 있던 작가는 인쇄 과정의 기계적 재현 방식을 회화 언어로 전환하는 문제적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단순한 패러디에서 나아가, 미키와 도널드의 유머러스한 대화 장면을 르네상스 회화의 ‘화가와 모델’ 구도처럼 설정하고 시선과 재현의 관계를 역전시켰다. 그의 첫 고전 재해석은 이듬해인 1962년 시작되었다. ‘Portrait of Madame Ce´zanne’을 통해 세잔의 회화에 관한 선언적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그는 세잔의 초상화를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미술사가 얼 로런(Erle Loran)이 저서 에 서 제시한 ‘구조 분석 도표’를 다시 그렸다. 그는 세잔을 분석하는 방법 자체를 다시 회화로 번역함으로써 양식의 언어가 또 다른 양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드러냈다.
손의 흔적을 감추는 환상, 기계적 회화
작가는 고전을 전환하는 이러한 작업을 ‘기계적 회화(mechanical
painting)’라 불렀다. “그림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그리는 게 아니라 재구성하려고 그립니다.” 작업 방식은 일정했다. 먼저 만화나 사진, 미술사
이미지 등을 작은 스케치로 재조합한 뒤, 불투명 프로젝터를 이용해 캔버스에 투사한다. 윤곽선을 연필로 옮기고 만족할 때까지 선을 다듬는다. 신문, 만화, 광고 등 대량 인쇄용 색상 재현 시스템을 상징하는 벤데이 도트(Ben-Day dots)는 금속 스텐실을 사용해 가장 먼저 찍어 넣는다. 그는 “결과를 예측하려는 거죠. 점은 항상 먼저 찍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밝은 색에서 어두운 색으로 칠해 내려가며, 마지막에 검은 윤곽선을 두른다. 이때 사용한 물감은 테레빈유에 녹는 마그나였다. 수정이 용이하고 흔적이 남지 않는 재료를 통해 완벽히 통제된 평면을 구현할 수 있었다. “제 그림이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보이길 바랍니다. 손의 흔적을 숨기고 싶어요.” 그는 수작업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인쇄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회화의 ‘기계적 환상’을 시각화했다.
"그림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그리는 게 아니라 재구성하려고 그립니다.
제 그림이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보이길 바랍니다. 손의 흔적을 숨기고 싶어요.
미술사를 패러디하다
리히텐슈타인은 이런 작업 방식을 통해 미술사 전체를 패러디와 경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내가 패러디한 것들은 모두 내가 존경하는 것들”이라고 강조했다. 작가는 1960년대 후반의 ‘Brushstrokes’와
‘Cathedrals’, ‘Haystacks’ 시리즈에서 미술사 해체 작업을 이어갔다.
‘Brushstrokes’는 드 쿠닝이나 잭슨 폴록 등 추상표현주의의 격정적인
붓질을 납작한 만화식 표식으로 치환해, 회화의 남성적·영웅적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작업이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과 건초 더미 연작을
다룬 ‘Cathedrals’와 ‘Haystacks’에서는 ‘빛의 회화’를 인쇄와 복제의
회화로 대체하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재현 문제를 팝아트의 재생산 문제로 전환했다.
고전 건축에서 예술가의 공간까지
1970년대,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고전 회화에서 나아가 고전 건축을 주제로 한 시리즈 ‘Entablatures’(1971~1976)를 전개했다. 그는 뉴욕 월가의 신고전주의 건물들을 직접 촬영하고, 그 장식의 일부를 추출해 평면 패턴으로 환원했다. 기둥과 프리즈, 코니스 등 구조적 요소는 의미의 장식이 아니라 산업적 반복의 문법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는 산업적 이미지의 질서를 회화로 끌어들여 고전주의의 권위가 어떻게 ‘형식’으로 작동하는지 드러냈다.
건축의 구조에 관한 관심은 회화의 전통적 주제인 ‘예술가의 공간’으로 옮겨 갔다.
그는 ‘Artist’s Studio’(1973~1974) 연작에서 마티스의 ‘The Red Studio’와 ‘The Pink Studio’를 참조하며, 자신의 대표 연작인 ‘Look Mickey’, ‘Brushstrokes’, ‘Entablatures’, ‘Mirrors’ 등을 회화에 다시 그려 넣었다. ‘Artist’s Studio’는 르네상스 이후 예술사에서 반복된 ‘화가의 방’ 도상을 팝아트적 방식으로 재구성 한 ‘회화의 구조에 대한 회화’다. 1980~1990년대 작가는 ‘이미지의 구조’를 탐구하는 연작을 이어나갔다. ‘Water Lilies’(1992)는 모네의 회화를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스크린 프린트로 재해석해, 모네가 빛으로 표현한 빛의 진동을 산업 재료와 인쇄 기술로 대체했다. ‘Nudes’(1993~1997)에서는 서양 회화의 전통적 누드를 만화적 형태로 표현했고, 마지막 연작인 ‘Landscapes in the Chinese Style’(1996)에서는 중국 산수화의 산의 중첩과 안개 효과를 점과 선으로 번역했다. 그는 이 시리즈를 ‘유사 명상적(pseudocontemplative)’이라 불렀는데 이는 명상조차 형식화된 시각 기호로 이 해하려는 태도였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고전 그리기’는 과거의 양식을 ‘팝아트’라는 현대적 미술 운동의 구조 속에서 다시 시험하는 행위였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이미지의 유통과 번역, 대량 복제와 전파의 과정이 미술의 맥락과 의미를 어떻게 바꾸는지 명료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ARTIST PROFILE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1923~1997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교수로 재직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1960년대 초 만화와 광고 이미지를 차용한 회화로 대중문화와 순수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웜!(Whaam!)’, ‘물에 빠진 소녀 (Drowning Girl)’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굵은 윤곽선과 ‘벤데이 도트’ 기법으로 상징되는 그의 작품은 현대 시각예술의 언어를 새롭게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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