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과 신체, 그리고 인간
안토니 곰리에게 인체란 인간의 영혼이 담긴 틀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Critical Mass, Musée Rodin, Paris, France, 2023-2024. Brust, 2022, cast iron, 100.5*54.6*80.1cm. Photograph by Oak Taylor-Smith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는 ‘신체(human body)’와 ‘공간(space)’의 관계를 탐구하는 조각 작품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국 조각가다. 근대 이후의 서양 조각은 움직이는 인체의 한순간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안토니 곰리는 자신의 몸을 석고로 떠 주물을 만드는 인체 작업을 통해 조각이 신체를 포착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인체를 인간의 영혼이 담긴 틀이자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이러한 사유를 토대로 곰리는 단단한 대리석에 극적으로 박제된 인체를 부정하고,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닌 영역으로서의 신체, 사물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신체에 주목한 작업을 이어왔다. 조각에 매몰되었던 신체를 복원하는 것을 예술적 사명으로 삼는 그의 작업은 몸과 피부 반대편에 있는 것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같은 두렵고도 강렬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조각과 신체
작년 가을 파리 로댕 미술관에서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라는 제목으로 안토니 곰리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곰리는 지난 40년간의 인체 탐구가 집약된 조각을 실내 갤러리와 로비, 비론 저택 정원을 활용해 개방감 있게 전시해 관객과 비평가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전시장 곳곳에서 성사된 ‘곰리’와 ‘로댕’의 만남은 조각과 신체에 대한 관념에 새로운 화두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Antony Gormley, Body Politic, White Cube Bermondsey, London, UK, 2023–24.Bind, 2023, 8 mm mild steel, dimensions variable.
Photo © White Cube (Theo Christelis).
Antony Gormley, Body Politic, White Cube Bermondsey, London, UK, 2023–24. Installation view.
Photo © White Cube (Theo Christelis).
‘생각하는 사람’(1884)으로 잘 알려진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사람의 인체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섬세하고 사실적인 조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로댕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조각에 불어넣은 생명력으로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품으로만 여겨졌던 조각이 예술 영역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안토니 곰리는 로댕에 대해 “고전적 르네상스와 근대의 기법을 매우 선견지명 있게 결합해 조각을 해방시킨 선지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조각이라는 매체에 감정을 개입시켜 ‘예술적 자율성’을 획득하게 하고, 나아가 하나의 장르로 격상시킨 전설적 예술가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곰리 인체 조각의 특징은 무엇일까. 조각이 인체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점, 석고를 이용한 주조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조각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예술가라는 점은 곰리와 로댕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신체’와 ‘조각’에 접근하는 곰리의 예술적 태도는 로댕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먼저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작품 ‘크리티컬 매스 II’를 보자. 이는 곰리의 초기 인체 캐스팅 작품 중 하나로, 작가는 자신의 몸을 석고로 캐스팅해 일련의 주물 신체를 완성했다. 그러나 실제 몸을 본뜬 것임에도 그는 일부러 신체의 구체적 흔적을 제거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머리와 코, 팔, 다리, 몸통의 볼록하고 오목한 인체 실루엣만 남긴 그의 조각은 게다가 쪼그리고 앉거나, 기어가거나 눕거나 선, 인체의 가장 단순한 자세만 취하고 있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품에 대해 “우리가 눈을 감고 있을 때 신체에 거주한다고 느끼는 그 공간의 분명한 어둠을 다루고 싶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곰리의 조각에서 신체가 외형을 재현하기 위해 차용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그는 신체를 조각 형식으로 완성해 보여줌으로써 투박한 외면의 이미지를 경유해 내면의 감정과 영적 각성에 다시금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조각에서 신체는 로댕의 신체처럼 묘사의 대상도 아니며, 조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매개체로서 신체와도 다르다. 그는 특정한 순간에 놓여 있는 입체적 신체 형상을 통해 개인의 의식이 내재된 물질세계로서 ‘몸’으로 시각을 전환하고자 했다. 로댕의 생생한 신체 조각이 조각을 예술로 해방시켰다면, 곰리의 신체 조각은 역으로 예술에서 신체를 해방시켜 그 원초적 힘을 되돌린 것이다.
도시 속의 조각
‘몸은 몸에서 나온다’는 간결하고도 근원적인 문장은 안토니 곰리가 인간과 사회를 사유할 때 종종 언급하는 유명한 문구다. 여기에는 한 인간의 탄생에는 반드시 다른 한 인간의 존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생물학적 통찰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사회라는 더 큰 시스템에 가담된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의지도 담겨 있다. 단일한 인간이 서로 연결되며 존재한다는 이 아이디어는 1980년대 작품에서 조금씩 드러나다가, ‘더블 블록웍스Double Blockworks’(2017~2021) 시리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탐색되기 시작한다. 몸을 직접 캐스팅하지 않고 블록 모양의 조철을 쌓아 신체 형상을 만든 이 시리즈는 두 몸이 서로 안고 있거나 기댄 자세로 표현된다. 초기 캐스팅 작품이 내면의 존재를 확인하는 ‘틀(mould)’로서 신체를 제시했다면, 블록 시리즈에서는 신체를 내면을 확인한 인간이 타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럼으로써 발생한 관계의 의미를 묻는 언어로 제시한다.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곰리의 고찰은 최근 들어 ‘인간과 건축’의 관계 탐색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 신세계 트리니티 가든에 설치된 작품 ‘Think’(2017)가 대표적인 예다. 정확히 ‘캐스트 슬래브웍스Cast Slabworks’(2014~2020) 시리즈에 속하는 이 작품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앞선 ‘더블 블록웍스’의 감정선을 계승하는 작품이다. 곰리는 건축에 사용하 는 강철 슬래브 판을 결합해 슬픔이나 상실, 먼 지평선을 향한 열망에 찬 몸짓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언급했는데, 그래서인지 ‘Think’는 연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하며 어딘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내면의 고고함을 발산한다. ‘Think’를 포함한 슬래브 연작에서 작가가 주목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이 조각들이 여러 개의 판으로 연결되지만 단일한 몸체로 완성된다는 점이다. 수만 개의 자재가 서로 맞물려 하나의 건축물로 완성되듯 개별 슬래브 조각은 서로 기대고 지지하면서 하나의 신체로 귀결된다. 의존적인 동시에 창의적인 존재, 안토니 곰리는 바로 이 모 습이야말로 대도시의 그리드 안에서 살고 있는 지금 우리 모습이라고 말한다.
Critical Mass, Musée Rodin, Paris, France, 2023-2024. Critical Mass II, 1995, cast iron, 60 life-size elements, dimensions variable(detail).
Photograph by Oak Taylor-Smith
인간은 수직과 수평이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공간에서 사는 유일 한 동물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위해 건축 형식을 차용한 인간을 직조했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를 프레임 된 추상공간 안에 배치시킨다. 그리고 그 위치가 어디인지 에 따라 우리 존재의 가치가 확인되곤 한다. 건축을 ‘물리적 철학’이라 고 본 곰리는 이처럼 조각을 통해 건축과 신체, 그 속의 삶을 치열하게 사유하고자 했다. 인구 대부분이 도시의 빌딩 숲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곰리의 사유는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자연 속의 조각
신체를 통해 인간 내면을 발견하고, 타자를 통해 연결을 발견하며, 연결을 통해 건축을, 건축을 통해 도시를 사유하는 곰리의 이런 확장형 공간 감각은 사실 ‘자연’이라는 공간과 만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발휘 한다. ‘북쪽의 천사(The Angel of the North)’(1998)는 드넓은 대지에 놓인 거대한 조각상으로 곰리를 설명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안토니 곰리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미술관을 벗어나 야외 공간에 놓일 때 ‘조각’과 ‘자연’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로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곰리는 작품이 설치될 예정인 잉글랜드로 펠Low Fell 언덕의 역사를 탐색했다. 어두운 땅굴 아래서 수 세기 동안 채굴 노동을 해온 탄광 노동자의 서사를 발견한 작가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신체 형태를 변형한 ‘천사’ 모양의 조각을 만들어 언덕 위에 설치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그는 천사가 “잊힌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사적 기능, 그리고 산업 시대에서 정보 시대로 전환되었음을 표현하는 미래의 상징”이 되기를 바랐다고 언급했다. 이는 조각을 통해 자연에 축적된 기억과 변형을 불러 모으고, 공간의 기억을 다시 미래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곰리의 조각은 시공간의 통로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완료하는 것이다.
안토니 곰리는 예술은 육체와 정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산만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대신 모든 존재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는 바다처럼 예술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공간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속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예술이 제공하는 유일하고 가장 특별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한 평론가의 질문에 곰리는 대답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바위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 것 같나요?”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내면의 끝없는 어둠을 응시하는 것, 칠흑 같은 피부 위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태양 빛을 반사하는 것. 밀려오는 감상을 모두 서술하긴 어렵지만, 곰리의 질문은 어느 때보다 깊은 시간과 공간의 지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