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예찬
반죽을 눌러 제면기로 뽑아낸 압출면처럼, 냉면 한 그릇에 농축된 미식의 기록.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면스플레인’을 펼치는 이들의 이야기는 서울식 미각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국수를 뽑는 방법은 다양하다. 밀가루로 만드는 면은 길게 늘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수타 짜장면을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메밀, 감자가루, 녹두전분 같은 잡곡분을 써서 국수를 만들 때는 이런 식으로 당겨 늘여서는 불가능하다. 글루텐 함량이 낮거나 글루텐이 아예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죽을 평평하게 펴서 칼로 자르거나 국수틀에 넣고 눌러 뽑아야 국수를 만들 수 있다. 냉면은 이런 압출면의 대표 격이다. 누가, 언제부터 냉면을 먹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냉면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 조선 후기 문신 장유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펴낸 <계곡집>에는 ‘자장냉면’이라는 시가 나온다. 자줏빛 육수가 노을처럼 영롱하고 옥색 가루가 눈꽃처럼 흩뿌려진 모습의 냉면이다. 조선 시대 냉면 육수에 동치미 국물, 콩물, 깻물, 오미자 국물 등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자줏빛이 도는 국물은 오미자 국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장냉면 육수 재료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추측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여름철 별미로 굳었지만 한반도에서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국수였다. 그 시작이 겨울일 수밖에 없는 것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차가운 국물을 만들 때 필요한 얼음이나 동치미 국물이 겨울에나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얼음 보관과 제빙 기술이 발달하자 여름에도 냉면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917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은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을 구분해 설명한다. 가게에서 파는 여름냉면은 고깃국이나 닭국을 식혀 국수를 말고 한가운데 얼음 한 덩이를 넣는 것이고, 집에서 만든 여름냉면은 장국이나 깻국, 콩국에 국수를 말고 얼음을 넣어 먹는 방식이다. 우리가 아는 냉면 형태에 가까운 건 역시 겨울냉면이다. 겨울냉면은 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부어 만들었다. 냉면이 겨울 음식이었던 것은 메밀과도 관련 있다. 과거에는 주로 국수를 만드는 메밀의 수확 시기가 늦가을이었다. 메밀은 2개월이면 성큼 자라 수확할 수 있지만 여름에 거두면 저장이 만만치 않다. 메밀에는 대부분의 곡물과 비교해 2배에 달하는 지질이 들어 있어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저온에서 저장할 수 있는 겨울에야 그나마 장기 보관이 가능했다. 겨울이 수확 적기이므로 여름에 씨를 뿌려 늦가을에 거두는 게 시기상 적절하다.
냉면이 겨울 별미로 여겨진 것은 추운 겨울날 따끈한 온돌방에 앉아 맛보는 차가운 국수의 운치 때문이기도 하다. 1929년 12월 <별건곤>이란 잡지에 실린 칼럼니스트 김소저의 냉면 예찬을 보자. “살얼음이 뜬 진장김칫국에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바깥은 추운데 펄펄 끓는 온돌방에 앉아 쩡한 동치미 국물에 만 국수를 맛보는 재미란. 이런 역설적 즐거움은 1941년 <문장>지 종간호에 실린 백석의 시 ‘국수’로 이어져, 다시 1973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로 이어진다. “밤 깊도록 윷놀이를 하다가는 밤참으로 얼음 동치미에 막국수를 말아 꿩고기 꾸미를 얹어 먹지. 그 맛이란 참! 이불을 목에까지 뒤집어쓰고 훌훌 소리 내며 먹으면 위에선 이가 시려 덜덜 떨리고 아랫도리는 방바닥이 뜨거워서 후끈후끈 달고….”
세대와 계절의 제한 없이 사랑받아온 냉면은 유래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맛을 낸다. 먼저 해주냉면은 황해도 해주의 냉면을 재해석한 것으로 백령도, 옥천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청양고추와 고추씨 등을 활용해 매운맛을 낸다. 지리산 인근 메밀로 만드는 진주냉면도 독특하다. 한편으론 바다에 인접한 곳인 만큼 육수에 바지락, 마른 홍합, 마른 명태 등 다양한 해산물이 등장한다. 더불어 제사 음식인 소고기 육전을 고명으로 올린다. 진주냉면에서 유독 진한 육향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