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유전자에
새겨진 종교다
2021/03 • ISSUE 34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결심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서 달라진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Kim Jihye
"인생은 단거리보다 장거리달리기에 가깝다.
때로는 폭발적 순발력이 필요하지만, 전체로 보면 빠르고
힘차게 달려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주 적다."
신체는 마음을 드러내고, 행동이 인간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전교생 달리기가 있었다. 동시에 출발해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200m 달리기 행사였다. 열심히 응원하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반 바퀴쯤 달렸을 무렵, 내가 맨뒤에 처져서 유유히 혼자 달리는 중이었다. 있는 힘껏, 더 빨리, 이런 생각이 본래부터 내 안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신체가 마음을 드러낸다. 행동이 인간을 보여준다. 인지과학에는 ‘몸이 된 마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음은 신체 활동의 결과라는 뜻이다. 인간은 몸의 움직임에 맞추어 마음을 형태 잡고 길러낸 다. 느리게 달리는 몸이 빠른 마음을 만들지는 못한다. ‘뒤에서 천천히 달리는 아이’는 집안에서 오랫동안 나의 이미지였다.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느릿하고 느긋하게…. 한마디로 지독한 몸치에, 둔한 아이였다.
100m나 200m 달리기는 늘 거의 꼴찌였다. 다만, 끈질겼다. 1,000m, 3,000m 달리기는 보통 중간 이상이었다. 운동장 한 바퀴를 돌 때는 여전히 뒤쪽이나, 다섯 바퀴쯤 달리면 중간 정도였고, 그이상 달리면 때때로 앞쪽이었다. 오래, 꾸준히, 내 속도로, 천천히… 몸이 바라는 대로 살고, 적합한 일을 할 때에만 마음이 편했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은 결과도 좋았다. 다행히 세상엔 문학처럼 느린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오래 달린다.
인생은 단거리보다 장거리달리기에 가깝다. 때로는 폭발적 순발력이 필요하지만, 전체로 보면 빠르고 힘차게 달려서 이룰 수 있는 것 은 아주 적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장거리 주자이고, 우리 마음 역시 거기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다. 타고난 것과 다르게 살면 얻는 것은 적고 불행은 커진다. 더 힘차게, 더 빠르게 살 것을 요구 하는 현대의 삶은 놀라운 풍요를 이룩했으나 조금도 인간을 구하지 못했다. 갈수록 번잡한 일은 늘어나고 우울증은 심각해지고 있다.
나무에서 갓 내려온 우리 조상들은 별로 빠르지 않았다. 나무에서는 빠를 필요가 없다. 손만 뻗으면 잎이 있고, 철 따라 열리는 과일이 있으며, 단백질을 제공하는 곤충도 흔히 만날 수 있다. 포식자를 피할 정도로만 빠르면 충분하다. 지상의 삶은 다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 먹이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다. 게다가 사냥감 대부분은 인간보다 빠르거나 힘이 세다.
인간은 치타나 사자가 아니다. 순식간에 사슴을 따라잡을 수 없다. 창을 던져 일격에 사냥하는 세계는 머릿속에만 있다. 한 방에 맞히기도 어렵지만, 맞아도 동물은 힘닿는 데까지 도망친다. 피 흘리며 빠르게 달아나는 동물은 다른 포식자들을 불러들인다. 힘 약한 인간은 대부분 이들을 무찌를 수 없다.
인류의 사냥 비결은 무리를 이루어 달리면서 먹잇감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뿐이었다. 너무 늦으면 사냥감을 놓치고, 너무 빠르면 사냥감보다 먼저 지친다. 적당한 속도로, 오랫동안 달릴 수 있어야 사냥이 가능했다. 침팬지에게 없는 목덜미 인대나 족궁이 발달하고 아킬레스건이 생겨난 것도 달리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체코의 육상 선수 에밀 자토페크는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라고 했는데, 인류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사바나의 들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오래 달리는 쪽으로 진화했다. 우리는 모두 장거리 선수다.
우리 마음 역시 오래달리기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왜 달리는가>에서 미국의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는 인간의 마음이 장기 목표를 추구하도록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는 행위엔 꿈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먹잇감이 언덕 너머로 사라져도 마음의 눈에 목표로 남겨둘 수 있다.” ‘너머’를 상상하고 달리는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열정을 키우고 몸을 움직여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을 인간보다 잘하는 생물은 지구상에 없다. 꿈과 끈기, 상상력과 지구력이 한 쌍을 이루면서 굴러가는 일만을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이유다.
인간 마음의 진화적 특성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저기’ 에 맞춰져 있으므로 인간은 빠른 학습자일 수 없다. 생명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인간은 무척 느리게 배우는 편이다. 세상에 나온 지 스무 해 가까이 되어야 간신히 홀로 설 수 있는 드문 존재다. 그나마 어설프기 짝이 없다. 사랑, 우정, 신뢰, 명예, 예의, 존중 등 삶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평생을 살아도 잘 배우지 못한다. 인간의 덕은 하루하루 성취가 아니라 시간을 모으고 노력을 쌓아야 간신히 생겨날 수 있다.
"달리기와 꿈꾸기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달린다는 것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달리기의 황홀경 덕분이다."
인간 삶의 가치는 장거리에서 결정된다.
일찍이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이라고 말했다. 행복이란 ‘가장 좋은 것’을 뜻한다. 이 땅에서 수십 년을 보낸 후 누군가가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살면 행복을 자부할 수 있을까. 앞섰던 자가 뒤처지고, 높이 오른 자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너무나 흔하지 않은가. 영웅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이를 잘 드러낸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 문제를 해결해 인간 지혜의 정점을 보여주고 테바이 왕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테바이를 덮친 감염병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자로 전락했다. 눈이 먼 채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면서 온 땅을 떠돌다 죽을 운명이었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 자라고 늙어 죽는 인간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자부했으나 끝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의 행복은 불행이고, 명예는 수치이며, 지혜는 맹목에 불과했다. 죽음만큼 지혜로운 것은 없다. 사람의 행복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무게를 달 수 있다. 행복은 천천히 달려 느리게 도착한다. 빠른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소확행’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에는 오직 느린 행복만이 존재한다. 인간 삶의 진짜 가치는 단거리가 아니고 장거리에서 결정된다.
외롭고 힘들 때 인간은 달리게 되어 있다
적당한 속도로 오랫동안 달리는 것은 신비한 경험이다. 무엇보다 마음의 불안을 녹이고 상처를 치유한다. 슬픔이 눈물을 만들 때, 얽힌 일로 가슴이 답답할 때, 넓은 들판에 나가서 숨 가쁠 때까지 달리고 나면 기분이 풀리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달려라 하니>의 하니나 <들장미 소녀 캔디>의 캔디가 외롭고 힘들 때마다 달리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인간은 누구나 우울하고 어려우면 가만히 앉아 있는 대신 달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까지 말이다.
20세기 이후 미국에서 장거리달리기 붐이 세 번 일어났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다. 첫 번째는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두 번째는 1970년대 초 베트남전쟁이 벌어졌을 때, 세 번째는 21세기초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다. 위기는 인간을 달리게 한다. 우리 주변에 혹여 천천히, 오랫동안 달리는 사람이 증가했다면, 세상은 이미 처참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집 근처 천변을 달리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주말에는 제대로 뛰지 못할 정도로 빼곡하다. 우리 유전자는 알고 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달려서 생명을 이어갔듯, 달린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너머를 보는 것이고, 잃었던 길을 되찾는 것이며, 삶을 돌려받는 일이다.달리기와 꿈꾸기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므로, 달린다는 것은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달리기의 황홀경 덕분이다.
달리기에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담겨 있다. 30분 정도 꾸준히 달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분이 빠져나간 입술은 건조해지고, 허파는 더 많은 산소를 요구하며, 다리로 피를 보내려고 심장은 뜨거워진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듯 할 때, 힘들고 지친 몸과 고통에 빠진 정신을 달래려고 쾌감 호르몬이 활동을 시작한다. 분비된 환상 속에서 달리는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 한 줄기 바람으로 변한다. 바람 속을 달리지 않고 바람이 되어 달리는 듯한 기분이 찾아온다. 달리기는 기쁨이 고통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육체의 한계가 이끄는 극도의 정신적 자유, 넋이 나갈 듯한 고양감은 인간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미국의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달리기의 황홀함’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피어난다고 말한다. “달리는 동안 정신은 육체와 함께 달아나고, 뇌의 맥동, 다리의 리듬, 팔의 흔들림에서 신비로운 언어의 꽃이 만개해서 고동치는 것 같다.” 이 언어를 좇는다면 이전과 다른 삶이 피어날 것이다. 달리기는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종교다. 낡아빠진 자아를 깨뜨리고 거듭나는 초월적 활동이다. 인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눈으로 ‘너머’를 보면서, 적당한 속도로, 꾸준히,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결심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서 달라진다.
봄이다. 공기가 무척 따뜻해졌다. 달리기 좋은 시절이 아닌가. 집콕 생활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자. 그 너머에서 새로운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