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잘스 ‘백악관 연주회’
본질적 가치
2021/03 • ISSUE 34
writerChoi Jeongdong 〈중앙일보〉 기자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2층에 이스트 룸East Room이 있다. 건물 동쪽에 위치해 명명된 이 방은 백악관에서 가장 큰 공간이다. 무도회, 리셉션, 기자회견, 음악회, 국빈 만찬 같은 대형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를 제외하면 백악관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낯익은 곳일 것이다. 1978년 카터 대통령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서명한 곳도, 1987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 핵미사일 협정 서명을 한 곳도 이스트 룸이었다.
1961년 11월 13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백악관 콘서트가 열렸다. 음악회 실황은 고스란히 녹음돼 LP로 발매됐다. 재킷의 큼직한 흑백사진은 위엄 어린 순간을 포착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가 내려다보는 백악관 이스트 룸에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여사 등 귀빈들이 앉아 있고, 파블로 카잘스가 첼로를 들고 서서 인사를 한다. 뒷줄의 손님들은 ‘첼로의 성자’를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중은 1백50여 명으로 미국의 음악가, 외교사절, 예술 애호가였다. 1시간가량 계속된 연주회는 모두 진지한 실내악으로 구성되었다.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Op. 49,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Op. 70, 쿠프랭의 연주회 모음곡 등이었다. 카잘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로 유명했지만 이날은 독주곡을 피하고 음악 친구들인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 피아니스트 미에치슬라브 호르초프스키와 협연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다감한 레너드 번스타인은 연주 내내 감동을 이기지 못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카잘스의 연주라서가 아니라, 그가 친구들과 빚어내는 화음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
앙코르곡이었지만 ‘새들의 노래(Song of the Birds)’야말로 카잘스가 이날 꼭 들려주고 싶은 곡이었을 것이다. 새들의 노래는 카잘스의 고향 카탈루냐 민요인데, 그가 첼로 연주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5년 6월,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BBC 스튜디오에서 카탈루냐 동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하고 이 음악을 연주했다. 그 후로 자신의 연주회 마지막에 이 곡을 연주하는 관례가 생겼는데, 이는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다. 카잘스는 언젠가 이 음악을 연주하고 “내 고향의 새는 ‘피스peace’ 하고 지저귄다”며 울먹인 적이 있다. 삶 내내 평화를 염원한 위대한 정신의 절규였다. 이날 백악관에서 연주한 ‘새들의 노래’는 흐느낌 같은 카잘스의 탄식과 함께 세계의 심장부를 울렸다. 카잘스는 연주회 전 케네디 대통령을 독대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 연주로 그의 의지가 모두 전달됐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연주회 직전 짧은 연설을 했다. 그중 한 문장이 음반 표지에 적혀 있다. “예술적 성취와 활동을 우리 자유 사회의 본질적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국제정치는 냉혹하고 국가 이익이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지난 4년 동안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본질적 가치’를 위한 행사가 열린 기억이 별로 없다. 바이든의 백악관을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