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수행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고, 주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을 실행하는 과정입니다. 영적인 갈구와 근원적 진리를 향한 열망은 우리 모두의 삶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으나, 고단한 일상과의 괴리로 인해 종종 간과되곤 합니다. 신세계갤러리는 기획전 <묵상>을 통해 김시영, 박서보, 윤형근, 이배, 정창섭, 최명영 등 미술의 언어를 통해 수행하는 유수의 작가들의 미적 성취 중 일부를 발췌합니다. 그리고 작가들의 시각적 경이를 향한 여정과 관객의 내면 세계가 조응하여 예술적 경험을 넘어선 내적 고요와 깨달음의 순간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정창섭(1927 – 2011)의 대형 평면회화가 제일 먼저 관객을 반깁니다. 일견 텅빈 캔버스로 보이는 정창섭의 화면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정창섭은 그리지 않습니다. 다만 한지의 원료를 손으로 밀고 눌러 반죽과 신체가 빚어내는 행위 자체를 드러낼 뿐입니다. 물기를 머금은 닥 반죽과 손이 맞닿아 만들어내는 신체적 교감을 통해 발현되는 섬세한 종이의 결은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더불어 단정한 사각의 형태로 빚어져 조용히 자신을 드러냅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정창섭은 악셀 베르보르토 갤러리–벨기에(2020),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 페로탕-뉴욕(2015) 등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정창섭의 작품은 국민훈장 목련장(1993) 등으로 예술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전시장 전체에서 <묵상>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단단한 끈인 김시영(1958- )의 도자 작품은 평명회화와 입체조형의 깊이 있는 조응을 보여줍니다. 전통 흑자 도자를 재현하는 것에서 탄생한 김시영의 작업은 불과 유약이 만나 변화하는 우연적 효과인 요변窯變이 생성되는 순간을 다루며 점차 도자라는 장르를 초월해 흙의 물성 실험에 이르렀습니다. 한국 전역에서 수집한 흙과 불의 환경인 가마를 조절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발전한 그의 작품 세계는, 제한된 장르 내에서의 부단한 연구를 통해 전형적 패러다임을 뛰어 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단색화 회화와 같은 문법을 공유합니다.
윤형근(1928 – 2007)은 면포나 마포의 표면에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과 땅의 색인 암갈색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정색'을 큰 붓으로 찍어 내려 천지문天地門을 형상화한 특유의 작품세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묵상>은 신비로운 번짐의 변주가 돋보이며 고목과 흙을 연상시키는 80년대의 작품부터 도널드 저드와의 만남 이후 보다 순수한 검정에 가까워지며 극단적인 미니멀한 조형을 추구한 90년대까지의 작가의 여정을 담습니다. 특히 흑자의 다양한 요변을 실험한 김시영의 도자와 어우러져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검정의 깊이있는 변주를 보여줍니다.
통로를 지나 갤러리의 N관으로 이동하면 한국 단색화의 세계화를 이끌었다고 일컬어지는 박서보(1931-2023)의 200호 대작 ‘묘법’이 관객을 반깁니다. 박서보는 1950년대 후반부터 단색화 작업을 시작하여 흙, 모래, 돌, 헝겊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점화', '그리드', '아크로마틱' 등의 기법을 개발했으며 특유의 단순한 형태, 질감은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습니다. '묘법'은 면도날, 칼 등으로 캔버스를 긁는 기법으로 반복적인 행위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기 성찰의 미학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한한 반복이라는 행위의 심오함을 보여주는 최명영 (1941 - )의 작품은 회화 평면의 비조형성에 집중하며, 반복적 수행성을 통한 물질과 정신의 화학적 결합을 추구합니다. 50여 년 동안 물질의 부동성과 평면적 존재가치를 탐구하며 치열하게 사유해온 작가는 회화의 평면을 통해 삶의 매 순간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며 <묵상>은 이러한 작가의 여정에 잠시나마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전시장의 통로 및 좌측에서는 작가 이배(1956 - )가 숯과 밀랍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미디엄Medium 연작이 김시영의 대형 달항아리 및 리에거Liagre의 예술적인 가구와 배치되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나무로 태어나 자신의 몸을 태우고 땅으로 돌아가는 순환구조가 담긴 재료인 '숯'을 통해 구현된 이배의 검정색은 현실적 요소가 압축되고 축적된 포화상태를 표현합니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불안정한 세계에서의 변치 않는 본질적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며, 작품들은 예술적 행위의 결과를 넘어서 우리의 삶과 연결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흔적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에고를 넘어선 근원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하며, <묵상>은 예술과 수행이 만나는 깊은 지점에서의 핵심적 경험을 나누고자 애쓴 소박한 시도입니다. <묵상>을 통해 세련된 미술이라는 경지를 넘어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을 탐험하고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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