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활용한 설치미술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이반 나바로(Iv´an Navarro, 1972~). 그는 거울과 조명이 발생시키는 매혹적인 빛의 반복을 통해 어두운 현실과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은유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칠레 작가다. 전등의 발명은 칠흑같이 긴 밤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혁신이었지만, 동시에 저녁의 휴식을 앗아간 현대 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가 칠레를 잔혹하게 억압하던 1970년대, 군부독재 정권에서 성장한 나바로는 전기와 빛이 인간 삶의 방식을 바꿀 뿐만 아니라 통제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체감했고, 형광등과 네온의 화려한 조명을 활용해 혁명적 주제를 전달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여왔다. 지난 수년 동안 그가 전한 메시지는 고문과 투옥, 증오와 학살 같은 우리 시대 가장 어두운 면이었지만, 그의 네온이 밝히는 눈부신 빛은 최초로 인류의 밤을 밝힌 전구처럼 어둠으로부터의 자유와 희망,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서로 다른 빛의 의미
이반 나바로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네온 아트의 상징’ 같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약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네온 아트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그런데 이 수식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네온을 소재로 사용하는 현대미술계가 존재할 만큼 네온 아티스트가 많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그중에서도 먼저 ‘별’의 위치를 선점한, 네온 아트로 미술사적 성과를 거둔 거장들도 존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라이트 아트light art의 대가 댄 플래빈Dan Flavin이다. 댄 플래빈은 미니멀리즘 계열의 아티스트로 네온관이나 형광등을 이용한 빛 조형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이반 나바로의 설치 작품은 종종 플래빈의 미니멀리즘에 영향을 받은 라이트 아트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반 나바로 자신은 댄 플래빈에게도, 미니멀리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한 인터뷰에서는 “미니멀리즘은 나의 적”이라고 말했을 만큼 기존 미니멀 계열의 계승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최소한의 예술’이라는 의미의 미니멀리즘은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과 기교를 배척하고 사물의 본질만 표현할 때 현실과 작품 사이의 괴리가 제거된 진정한 리얼리티 예술을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주도된 예술 경향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 미술에서 두드러졌던 이 흐름을 타고, 당시 회화는 사물 묘사를 배제하고자 했고, 조각은 특정한 형상으로 보여지기를 거부하면서 사물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형광등에 변형을 가하지 않고 제품 그대로를 전시장에 배치시킬 뿐인 작품으로 라이트 아트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한 댄 플래빈의 명성도 이 같은 미니멀리즘의 기류와 일맥상통한다.
전복의 제스처로 재구성하다
그렇다면 작품을 통해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는 이반 나바로에게도 미니멀리즘과의 동일한 대등관계가 성립될 것인가. 작가가 보기에 대상의 본질만 남긴다는 명목으로 극도의 무의미를추구하는 미니멀 양식은 예술에 내재된 정치성을 은폐하는 통제 행위와 다름없었다. 특히 칠레에 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데 일조한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의 불투명한 정치성이 성행한다는 사실은 라틴아메리카 출신 예술가 나바로에게 통제 정치와 식민지화를 상징하는 예술의 또 다른 표현으로 비칠 뿐이었다.
하지만 이반 나바로는 이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미니멀리즘의 규칙을 자신의 작품으로 승화하고 해체한 다음, 전복의 제스처로 재구성하는 흥미로운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작업 경향은 그가 2000년대 초반 뉴욕에 정착한 이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형광등으로 만든 사다리 조형물 ‘범죄의 사다리(Criminal Ladder)’(2005)가 대표적인 예다. 댄 플래빈이 형광등으로 작품 형태를 단순화해 의미의 발생을 최소화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나바로는 형광등을 쌓아 올려 직관적 형태의 사다리를 완성하고 그 위에 독재 정권에서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올림으로써 사회 비판적 의미를 증폭시키고자 했다. 20m에 달하는 거대한 형광등 사다리는 눈부신 불빛만큼이나 강렬한 어조로 칠레의 어두운 역사를 고발한다. 즉 미니멀리즘의 빛이 특정한 예술 형식을 이룩하기 위해 주어진 ‘매체로서의 빛’이었다면, 이반 나바로의 빛은 미국 미니멀리즘의 언어를 경유해 칠레와 국제 관계 사이에 은폐된 공간에 불을 켜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된 빛’이었던 것이다.
음악과 빛과 언어
이처럼 이반 나바로는 “보이는 것이 그대로다”라는 미니멀리즘의 모토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빛이라는 소재를 차용해 암시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예술과 사회 전반에 혁신적 감각을 일깨우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켜왔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까지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빛을 이용한 일루미네이션과 착시, 언어유희와 음악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작품에서 빠져서는 안 될 주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에코2ECO2’(2011)를 보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베이스드럼이다. 재활용 악기는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동시에 네온 글자가 놓일 전시 공간 역할을 담당한다. 또 악기 내부의 텍스트는 거울 반사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기법과 소재는 나바로 작품에서 10년 이상 변주되며 등장한 ‘드럼 시리즈Drum Series’(2009~2017)와 공명하는 작품군으로 여기에서도 악기와 거울, 빛을 이용한 착시와 언어유희적 특성이 어김없이 발견된다.
이반 나바로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키워드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드럼으로 상징되는 ‘음악의 사회적 힘’, 다른 하나는 네온 텍스트가 주는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메시지’ 의 효과다. 어린 시절 혁명과 전쟁을 주제로 한 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작가는 음악이 사회적 역할을 해내는 것을 목격했고, 음악이 지닌 저항과 자유의 힘을 은유하기 위해 드럼을 작품에 차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네온 텍스트는 어떤 의미일까. 이반 나바로의 작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드럼 안쪽에서 빛나는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한 번쯤 고민해봤을 것이다. 네온 텍스트는 작품 ‘에코2’의 ‘ECO(메아리)’같이 시적 표현의 단어이거나 ‘BOMB(붐)’, ‘BLAST(쾅)’같이 의성어이거나 ‘ECCO(여기)’같이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닌 단어가 주로등장하기에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나바로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모호하고 객관적인 언어의 양면성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줄 것을 관객에게 당부한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네온 빛으로 빚은 텍스트. 나바로는 둘 사이의 간극을 주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에 집중해달라고 요청한다. 어두운 동굴로 빨려 들어가듯 서서히 아이러니에 다가가는 동안 빛의 언어 너머에 있는 역사적이며 혁명적인 메시지와 우연히 마주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반 나바로의 실존적 탐구
전 세계 곳곳에서 관객을 만난 지도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반 나바로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재료의 탐색과 실험을 통해 여전히 외연을 넓혀가는 중이다. 특히 팬데믹 기간을 통과하면서 작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권력관계를 넘어 우주의 세계,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에 대한 실존적 탐구에 집중하기 시작한 듯 보인다. 거울과 LED, 네온 불빛을 활용해 천체 우주의 장엄함을 표현한 ‘성운(Nebula)’(2022) 시리즈에서는 매끈한 표면 위에 우연한 붓질 기법, 즉 회화적 요소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시도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전기와 빛을 소재로 인간 간 힘의 구조에 관해 질문해왔다면 이제 그는 우주를 정복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끝없는 충동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별을 관찰할 때 비로소 우주의 가장 깊은 비밀을 마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게 만드는 반사 효과를 활용해 거울 속에 신기루 같은 우주를 만들어 우리 앞에 내놓는다. 숭고하면서도 약간은 불안한 이 가상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깊은 곳에 묵혀두었던 질문들과 불현듯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확장하는 우주 속에서 티끌과도 같은 인간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들 말이다.
ARTIST PROFILE이반 나바로 IVÁN NAVARRO(1972~)칠레를 대표하는 설치미술가. 현재 뉴욕을 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자비한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던 피노체트 독재 정권의 경험을 바탕으로 네온과 형광등 거울을 사용해 날카로운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그에게 빛은 희망의 상징이며, 자유에 대한 갈망이자 끝내 이루어낸 해방의 상징이다. 마이애미 현대미술관, 베니스 비엔날레, 폴 카스민 갤러리 등 주요 미술 기관에서 전시했으며, 그의 작품은 사치 컬렉션, 국립현대미술 컬렉션(Fonds National d’Art Contemporain), 루이 비통 컬렉션 등 유명 미술 기관 및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다. |
writerShin Iyeon 독립 기획자
editorKim Minh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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