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떠나는 사색의 여행지
인생에 쉼표가 필요하다면 고즈넉한 여행지를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주 잠시 또는 온전한 하룻밤 동안 당신의 일상에 선명한 쉼표를 남기는 고요한 장소와 순간들.
세상을 향한 꿈이 동백처럼 피어오른 땅,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남해 바다의 물살이 깊숙이 들어온 강진만을 보며 다산 정약용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선시대 후기, 강진으로 유배 온 그는 만덕산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지은 다산초당에서 10여 년간 머물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6백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다산은 강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백련사 혜장 스님과 깊은 교우를 나누며 자신의 처지를 달랬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동백나무 숲에 파묻힌 백련사에 다다르는데, 다산과 혜장은 시시때때로 이 길을 오가며 시와 서를 이야기하고 함께 차를 음미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오늘날에도 1월이면 꽃잎을 여는 동백과 강진만의 차가운 바다는 여전히 멀리서 찾아온 이를 기다린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 면 그의 못다 한 꿈이 이제야 피어오르는 듯하다. (ADD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TO STAY 사의재 한옥 체험관│예부터 객을 맞이하던 주막 자리에 강진군이 지은 한옥 체험관으로, 다산은 강진에 유배 온 초기 4년간 사의재에 머물렀다고 한다. 2022년 12월부터 올모스트 홈 스테이 바이 에피그램으로 유려하게 변신해 운영 중이다. 21만원부터.
CONTACT www.instagram.com/almosthome.stay
TO SEE 백운동 원림│월출산 남쪽에 자리한 백운동 정원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더불어 전라남도 3대 정원으로 꼽힌다. 다산의 제자 초의 선사가 그린 ‘백운동도’를 바탕으로
복원했고, 별서와 월출산 봉우리 풍경이 서화처럼 어우러진다.
TO EAT 청자골종가집│강진의 유명 한정식집 중 한 곳. 넓은 정원이 딸린 한옥에서 산낙지, 장어구이, 참숭어알, 홍어찜, 굴전, 토하, 밴댕이, 바지락젓갈 등 강진의 맛으로 가득 채운 상차림을 낸다.
TO EXPERIENCE 백운차실│월출산 아래서 재배한 전통 백운옥판차를 시음할 수 있는
곳. 백운옥판차는 다산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간 뒤에도 그의 집안에 차를 만들어 보냈던
다인 이한영이 강진의 차 문화를 계승해 만들었다. 다양한 차로 이루어진 고아한 패키지는
선물용으로도 좋다.
다산의 유배지 강진에는 다산초당과
서암과 동암, 천일각 등이 모여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과 강진 풍경
강진의 짙은 동백 숲 사이로 드러난 백련사
다도해 앞에서 마음을 위로하다, 경상남도 남해
남해 보리암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시인 이성복의 문장처럼, 금산에서 내려다보는 남해 바다는 한겨울의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 하여 일상에 떠밀린 많은 이가 금산의 보리암을 찾아 마음을 쉬고 다잡곤 한다. 차를 타고 금산에 오르는 산길을 조금만 달리면 저 멀리 초승달 모양의 상주은모래비치와 다도해가 어우러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보리암에서 남해를 한가득 품은 뒤에는 금산의 능선을 따라 걸음을 이어가보자. 군데군데 마주치는 기암과 바다가 당신의 마음을 조금 더 시원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ADD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65)
TO STAY 이제 남해│모던한 료칸 스타일의 디자인 호텔. 체크인 시 스트레스 지수를 체크해 투숙객에게 적합한 아로마 오일과 차를 제공한다. 객실마다 히노키탕을 갖췄고, 별채탕에서 피로를 풀 수도 있다. 50만원부터
CONTACT www.ije.co.kr
TO SEE 남해각│1975년 남해대교 개통에 맞춰 문을 연 남해각은 북쪽의 임진각과 더불어
한국 관광산업의 태동을 알린 곳이다. 한동안 호텔과 음식점으로 쓰였고, 지금은 남해 여행
정보 플랫폼과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TO EAT 힙한식│남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주얼 레스토랑. 메뉴는 전복솥밥, 양념목살구이, 해물파전, 단 세 가지로 식자재를 풍부하게 살린 맛이 일품이다. 평일에도 최소 1시간 정도 웨이팅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수고가 아깝지 않다.
TO EXPERIENCE 스페이스 미조│미조항의 냉동 창고를 레노베이션해 조성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전시장과 숍, 카페에서 남해의 맛과 멋을 경험할 수 있고, 남해 제철 식자재를 활용한
쿠킹 클래스 등 여러 행사도 진행한다.
남해 돌창고 프로젝트는 현지 문화와 자연을 탐구하는 전시를 연다.
남해각에서는 최정화 작가 등의 작업을 볼 수 있다.
겨울이 살아 숨 쉬는 백색 숲으로,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순백의 눈보다 하얗게 빛나는 숲은 자작나무의 보금자리다. 인제의 깊은 산자락 속 약 60,000m2 면적에 심은 40여만 그루의 자작나무는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던 군락을 이뤄 겨울을 지샌다. 새하얀 수피를 코트처럼 갖춰 입은 나무가 끊임없이 도열한 숲 안에서는 길을 잃을 것만 같다. 사방이 백색이니 그럴 만도 하다. 2011년부터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얘기다. 자작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고위도에서 자라기 때문에 강원도 산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다. 원대리 원대봉 일대의 자작나무 숲은 원래 소나무 서식지였는데, 솔잎혹파리에 시 달려 피폐해진 소나무를 벌채하고 대신 자작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땅을 차지한 주인은 소나무에서 자작나무로 바뀌었으나 자연은 그대로 쉼터로 남아 있다. 자작나무 숲 안에는 산책로 세 곳이 조성되어 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산책로는 경사를 힘겹게 오르내릴 때도 있으나, 잠시라도 멈춰 주변을 돌아보면 가쁜 숨소리와 상념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옷깃을 여미고 쉬엄쉬엄 숲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여보자.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나무의 숨결이 온몸을 맑게 채워줄 것이다. (ADD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 75-22)
TO STAY 소월숲스테이│숲속에 들어선 단 3채의 스테이가 충만한 휴식을 보장하는 곳. 한옥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지은 파우재는 나무와 흙이 집을 감싸는 형태로 ‘근심을 덜어내는(破憂) 집’ 또는 ‘시간과 공간이 멈추는(pause)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32만원부터.
CONTACT www.sowolforest.co.kr
TO SEE 백담사│만해 한용운과 매월당 김시습 등 속세를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수많은
인물이 백담사에 은거했다. 눈 쌓인 겨울, 백담사의 말사 오세암과 봉정암까지 오르는 길은
겨울 설악산의 비경으로 꼽힌다.
TO EAT 황태 덕장│겨울에만 볼 수 있는 인제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가 용대리 황태 덕장이다. 나무로 엮은 덕에 매단 명태가 얼고 녹기를 두 달 넘게 반복하면 구수한 황태로 다시 태어난다. 덕장 주변에 이름난 황태 전문 식당들도 있다.
TO EXPERIENCE 필례 온천│한계령의 샛길 역할을 하는 필례령(은비령)은 예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필례 온천은 국내 최고 수준의 게르마늄 함량 온천수를 자랑하는 곳. 작은
노천탕에서 호젓하게 인제의 숲을 감상할 수도 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깊은 겨울의 채도를 완성한다.
소월숲스테이 파우재의 통창으로 숲이 한눈에 담긴다.
깊은 역사 속에는 여유가 흐른다,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
낙동강변,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하회마을 반대편 동쪽 기슭에 자리한 병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내로라하는 서원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병산서원 마루에 올라서면 긴장을 풀고 여유를 느낄 수 있다. 16세기 조선 중기 문신 류성룡이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지금 자리로 옮겨 온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입구에 서면 경사면을 따라 대략적인 서원 내부가 눈에 들어올 만큼 규모가 아담하다. 입교당 앞마당을 기준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각각 자리하고, 만대루가 정면을 메운다. 언뜻 답답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만대루가 그 너머 병산을 사원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만대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 8개가 눈앞 풍광을 일곱 장면으로 나누는데, 이를 ‘7폭의 병풍’이라 한다. 필요한 건물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선 간결한 구조, 서원 건축의 배경인 동시에 일부이기도 한 자연까지 입교당 대청마루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절묘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움과 여백이 선사하는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ADD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TO STAY 스테이 희게│안동 수곡리 무실마을에 새로 문을 연 독채 한옥 스테이. 자연과 어우러지는 모노톤 인테리어와 예술 작품이 따뜻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온수 야외 풀과 실내 저쿠지도 갖췄다. 45만원부터.
CONTACT www.instagram.com/stay_heegge
TO SEE 월영교│안동호를 가로지르는 387m 길이의 목조 다리. 중앙에 아담한 정자가 자리해
운치 있다. 해가 진 뒤엔 은은한 조명이 불을 밝혀 야경 명소로도 인기다.
TO EAT 전통 리조트 구름에│고택을 활용한 구름에 리조트의 한옥 라운지는 안동 전통 음식을 살린 조식, 중식, 석식을 정갈하게 낸다. 식사 후에는 1천3백여 권의 책을 보유한 북 카페 구름에 오프off에서 여유를 즐겨보자
TO EXPERIENCE 맹개마을과 농암종택│낙동강 지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맹개마을과
농암종택은 안동 술 문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쓰고 있다. 맹개마을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진맥소주’를, 농암종택에서는 대대로 전해져온 종갓집의 가양주 ‘일엽편주’를
경험해보자.
안동 무실마을의 모던한 독채 한옥, 스테이 희게
약 380m 길이의 목조 다리 영월교는 시선을 끄는 포토 스폿이다.
문화를 간직한 한옥마을에서의 휴식, 전라북도 완주
소양고택
산, 강, 호수를 아우르는 풍요로운 자연과 진한 로컬리티가 살아 있는 오성한옥 마을은 진정한 쉼과 재충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장소. 여러 한옥과 카페, 현대적 전시 공간, 산책로 등 즐길 거리가 아담한 마을 곳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종남산과 위봉산, 서방산의 온화한 산세가 사방을 첩첩이 감싸고 발치엔 고즈넉한 오성제 저수지를 둔 산자락에 발을 들이면 소양고택이 속세의 시간을 거스르고 싶은 여행자를 반긴다. 이곳은 단순한 스테이가 아니라 한옥 문화 체험관 역할을 한다. 다양한 전시와 이벤트가 마련되는 카페 두베와 완주 최초의 독립 서점 플리커 책방이 더해져 자연·전통·문화의 삼박자를 완성하는 것.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창밖의 설산을 감상하고, 장작 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사색에 잠겨보자. (ADD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472-23)
TO SEE 송광사│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평지 사찰로 종남산 끝자락에 자리한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대웅전 앞마당에 보물로 지정된 십자각 종루가 명물이다. 분위기가 아늑해 경내를 걸으며 마음을 추스르기에 좋다.
CONTACT www.songgwangsa.or.kr
비비정과 만경강│풍부한 생태 환경을 품은 만경강은 완주의 젖줄이라 일컬어진다.
조선시대에 만경강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감상하던 정자 비비정에서 겨울 철새와 낙조를
감상해보자.
TO EAT 새참수레│완주 로컬 푸드를 경험할 수 있는 농가 레스토랑. 신선하고 건강한 완주의 식자재로 조리한 슬로푸드를 뷔페식으로 즐길 수 있다.
TO EXPERIENCE 금강구름다리│1985년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출렁다리로 2021년 보수
후 재개장했다. 해발 700m 높이의 대둔산 임금바위와 임석대의 절경을 연결한다.
오성한옥마을의 고택들은 건축과 자연을 예술적으로 녹여냈다.
대둔산 금강구름다리는 마치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듯하다.
editor Lim Jimin photographerShin Gyuchul, Park Shinwoo
writerHur Taewoo 여행 매거진 〈피치 바이 매거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