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 초현실주의적 메시지
호안 미로의 작업은 불안한 세계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사유가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writer Park Junesoo 아트 칼럼니스트 editor Kim Minhyung
2024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열린 <Dreamworld: Surrealism at 100> 전시는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며 브뤼셀에서 시작해
다섯 개 도시를 순회한 대형 프로젝트의 마지막 전시였다.
2천여 점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소개된 이 전시에서 미국의 저명한
미술·문화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서 루보는 가장 성공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로
호안 미로를 뽑고 “그의 신비로운 작품들은 환상적 생물과 추상적 형태로 가득 차 있으며,
마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전시가 열렸다.
이 두 전시는 초현실주의를 단순히 미술사적 사조로 회고하기 보다
불안을 다루는 예술의 태도를 현재 문제로 다시 불러오려는 시도에 가깝다.
초현실주의는 더 이상 과거의 양식이 아니라 동시대적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왜 지금 초현실주의인가, 왜 다시 호안 미로인가
오늘날의 세계는 불안하지만 그 원인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고 복합적이다.
경제적 불확실성, 정치·사회적 양극화, 국제 정세의 긴장은 개인의 이성으로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이루며 일상에 만성적 불안을 남긴다.
사람들은 눈앞의 위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속에 서서히 지쳐간다.
이러한 정서는 20세기 초 유럽이 겪었던 불안의 구조와 닮아 있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긴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대항해시대를 이끌던 제국은 19세기 말 쿠바와 필리핀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몰락했고,
정치·경제·종교적 갈등은 사회 전반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유럽 전역을 휩쓴 스페인 독감을 겪으며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이후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 개인의 삶은 쉽게 소진되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현실의 비극 앞에서 직접 개입하거나 내면으로 침잠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호안 미로(1893~1983)는 바로 이 격랑의 시대에 스페인 내전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카탈루냐는 언어와 문화, 정치적 자의식이 강하게 응축된 지역이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카탈루냐 민족주의가 공존하는 환경에서 전통과 근대,
보수와 혁신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이런 조건 아래 미로는 단일한 미술 사조나 국가적 정체성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기호·선·리듬 중심의 독자적 언어를 구축하게 된다.
미로는 론자 미술학교(Bellas Artes de la Lonja)와 프란시스코 갈리의
예술학교(Escola d’Art Gall´)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다.
특히 갈리의 교육은 전통적인 관학적 학습과 거리가 멀었다.
학생들은 시각적 재현의 규범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눈을 가린 채 대상의 형태를 더듬고
기억으로 그려보며 감각과 지각을 훈련했다.
이러한 감각 중심 훈련은 훗날 미로의 회화와 조각 전반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1920년, 미로는 파리로 향한다.
전쟁과 전염병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파리는,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예술 실험이 이루어지던 장소였다.
이성과 과학의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큐비즘 이후의 실험적 회화와 반(反)예술 운동 다다이즘,
그리고 무의식과 자동 기술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은 초현실주의가 등장한다.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은 이러한 흐름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했다.
미로는 브르통과 긴밀히 교류하며 자유연상과 자동성에 깊이 공감했지만,
초현실주의가 요구한 정치적·이념적 결속과는 끝내 거리를 두었다.
회화적 사고가 공간으로
스페인 몬트로익 델 캄프와 파리를 오가던 미로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파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의 작업 공간과 다수의 작품을 잃은 그는 기존의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보다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이 시기 미로는 자유연상과 우연성을 통해
현실을 탈피하는 ‘마법적’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이론적 선언보다 작업이 생성되는 과정 자체를 중시한다. 자크 뒤팽이 1961년 발표한 책 <호안 미로>에 따르면, 그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작품을 끝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언젠가 무엇인가를 시작하게끔 암시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 대신 콜라주를 적극 활용하며 이미지가 스스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실험은 전후 그의 조각 작업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1920~1930년대 콜라주에서 실험된 조합의 사고는 실제 사물을 모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아상 블라주로 확장되었고, 이는 1940년대 이후 브론즈 조각으로 이어진다. 특히 1965년 이후 제작한 약 1백75점에 이르는 브론즈 조각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새로운 장르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회화적 사고가 공간으로 이동한 결과였다. 호안 미로 재단 대표이자 그의 손자인 호안 푼옛 미로(Joan Punyet Miro´)의 회상에 따르면, 미로의 스튜디오 한가운데에는 자연물과 사물로 이루어진 큰 원이 놓여 있었고, 그는 이 요소들이 스스로 대화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자연의 모든 요소는 그에게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존재였으며, 조각은 그 요소들이 거치는 영적 변형 과정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미로에게 조각은 독립적 장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