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은 소리의 여행이다
여여행은 견문見聞이다. 모든 여행은 보기의 여행이면서 듣기의 여행일 때 완전해진다. 낯선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생각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거리에서 들리는 소리는 감성을 얼마나 민감하게 하는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였다. 황혼 무렵, 거리에서 한 가수가 반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이 흥겨운 리듬을 일으킨다. 지나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하나둘 모여든다. 나도 거기에 있다. 누군가 발로 박자를 맞추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구른다. 몸이 저절로 리듬에 달라붙는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우리는 어울려 하나가 된다. 어떠한 강요도 없다. 나로 살면서 동시에 우리로 존재하는 것, 이것은 사랑의 체험이다. 무엇을 정하지 않고도, 소리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 행운을 얻는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열화당)에서 존 버거는 “사람들의 어깨와 머리 사이로 보이는 벽이 후렴구가 끝날 때까지 황금빛으로 빛난다”라고 묘사했다. 소리가 풍경을 황금빛으로 바꾼다. 스페인에서 축제 행렬에 우연히 끼어들었을 때도, 독일에서 시 낭송회에 무심코 들어갔을 때도, 나는 ‘황금빛 모서리’와 마주쳤다.
어떤 장소든 소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여행은 소리의 여행이다. 현대 여행 문화는 시각과 미각에 치우쳐 있지만, 조선 선비들의 여행은 소리를 빼놓지 않는다. 〈관동별곡〉은 ‘소리의 기록’으로 첫걸음을 시작한다. “백천동 곁에 두고 만폭동 들어가니,/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자자하니,/ 들을 제는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섯돌며’는 ‘섞여 휘돌며’라는 뜻이다. 멀리서 소리를 듣고 가까이서 경치를 구경한다. 〈열하일기〉는 어떠한가. 마지막 부분이 물소리로 가득하다. “일찍이 나는 문 닫고 누운 채 시냇물 소리를 듣고 견주어 나누어 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울리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청아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흥분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한 까닭이다.” 옛사람들은 자연을 볼 때 소리를 빼놓지 않았고, 때로는 풍경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를 맞추어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
초원은 종달새 우는 봄날에 걸어야 활기를 뽐내고, 폭포는 여름 장마철 다음에 가야 제맛을 누리며, 언덕은 풀벌레 소리가 한창인 가을에 이르러야 아름다움을 알고, 깊은 숲은 겨울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호수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한겨울 태양이 떠오름에 따라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이 갈라지면서 쩡쩡 노래를 부를 때다. 초가을 여행은 왜 하는가? 높은 하늘 밝은 달을 즐기며 이슬에 가랑이 젖는 줄 모르고 풀벌레 소리를 즐기려는 것이다. 바람에 솔숲이 울고, 부엽토는 뭉클한 향기를 뿜어내는데, 풀벌레들은 짝을 찾아서 우렁차게 노래한다. 시인의 귀가 열린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 뭐가?! 뭐가?!”
‘가을밤 2’에서 황인숙이 노래한다. 점층하는 질문이 여행자의 발을 붙잡는다. 초가을 벌레 소리는 외롭지 않고 청명하다. 벌레 울수록 쓸쓸함이 더하기는커녕, 즐거운 리듬이 일어선다. “명랑한 소름”이라는 시인의 이어지는 표현은 얼마나 적절한가. 여름의 후덥지근한 열기는 잦아들고, 상쾌한 바람이 벌레 소리와 어울려 밤마실을 부추긴다. 벌레들도 “소슬바람에 가팔라진 가슴/ 베어 물 듯”(‘가을밤 1’) 우는 늦가을과는 달리 운다. 소리 좋은 곳을 찾아서 어찌 온밤을 즐기지 않으랴. 보는 풍경이 아니라 듣는 풍경도 있다. 귀 있는 자, 들을지어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소리가 있다
지구는 소리의 행성이다. 자연은 끝없이 소리를 낸다.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 자연에는 침묵이 없다. 지구에서 가장 가기 힘든 장소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곳이다. 인위로 조성한 무음실에 들어서지 않는 한, 소리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자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기계에서 들리는 소음이다. 현대 문명은 너무나 시끄럽다.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흐트러뜨린다. 평소 우리가 소음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시각에만 주의를 쏟으면서 청각을 억지로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나간 채로 사는 걸 견딜 수 없어 자아를 되찾으려 할 때, 정숙한 곳부터 찾는다. 정적인 고요 속에서 영혼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무언無言의 속삭임으로 가득한 밤의 행렬”에서 “마치 산에서 눈이 녹아내리는 듯한”, “내 피의 고요한 찰랑거림”을 듣는다고 노래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다. 늦저녁에 갑자기 바깥을 보고싶어서 세 겹으로 껴입었다. 캠프장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저녁무렵 왔던 길을 한 걸음씩 걸어나갔다. 달은 얼마나 밝은가. 저 멀리서 만년설이 하얗게 빛났다. 온전한 어둠 속 사람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머물고 싶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민 방한 파카와 뒤집어쓴 모자가 거세게 펄럭거렸다. 세상에 온통 바람이 가득한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었다. 순간, 어디선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속삭이는 듯 가만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자박자박 발밑에서 땅이 울었다. 내 몸속의 소리를 이토록 자세히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비하고 경이롭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심오한 느낌이 등뼈를 훑어 내려갔다. 신령한 산(靈山) 히말라야 한복판에서 산이 울부짖는 거센 소리와 내 몸이 내는 소리를 번갈아 듣는다. 처음엔 너무나 낯설었다.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평온한 확신이 찾아왔다. 이것이야말로 나다.
여기, 이 얇디얇은 피부 밑에서 울려오는 소리로 나는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리가 있다. 내부에서 박동하는 이 소리가 인간의 존엄하고 고유한 정체성을 물리적으로 보증한다. 아무도 이 리듬에 함부로 간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손댈 수 없다. 설령 우리가 평소 이를 전혀 지각하지 못할지라도, 피가 순환하고 심장이 두근대는 이 소리는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하게 존재한다. “강도 높고 심오한 고독”(릴케) 속으로 들어설 때 우리 몸이 연주를 시작한다. 고요가 말을 걸어오는 곳에서 소리로 이루어진 정체성이 귀를 연다. 인간은 ‘소리의 생명체’다.
진정한 여행은 눈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여행은 눈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눈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소리를 들어왔다. 자궁 속에서 온몸을 웅크린 채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어머니의 두근대는 심장 소리, 허파의 규칙적인 수축과 이완이 만드는 소리, 혈액이 혈관을 흐르는 소리를 들어왔다. 어쩌면 인간은 이 소리를 모방해서 심장을 만들고 폐를 이룩하고 혈관을 형성하도록 진화해왔는지도 모른다. 눈에는 꺼풀이 있는데 귀에는 덮개가 없는 이유는 ‘보는 풍경’보다 ‘듣는 풍경’이 인간한테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듣는 것은 보는 것을 지배한다. 이 사실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 이것이 여행의 궁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