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LITTLE
FRIEND
반려동물은 내 안의 선을 믿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어디까지 선해질 수 있을까.
그 답을 반려동물에게서 찾는다.
모두가 바쁜 세상이다. 일도 많고 놀이도 많다. 오죽하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을까. 하루를 잘게 쪼개 돈도 벌고 취미도 즐기고 자기 계발까지 도모하는 삶을 ‘갓생god生’이라 부른다. 내일의 에너지까지 끌어다 쓰는 성실함은 미덕이 되었고, 다들 당연하게 바쁨을 찬양한다. 8년 전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도 그랬다. 사회부 기자 1년 차로 주중주말도 밤낮도 따로 없었다. 일이 바쁘니 쉬는 날 계획을 더욱 치열하게 세웠다. 보상 심리였다. 한번 집 밖에 나가면 시간과 동선을 딱딱 맞춰 알차게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했다. 어쩌다 아무 약속도, 할 일도 없는 시간이 생기면 초조했다.
빈틈이 쉴 틈이 되다
일상의 빈틈을 반기게 된 것은 고양이를 들이면서부터다. 집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은 내 고양이와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었다. 혼자 있는 고양이가 신경 쓰여서 웬만하면 빨리집에 가고 싶었다. 그토록 꺼리던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 을 구태여 만들어 즐겼다. 퇴근 후 지쳐서 ‘저녁이 없는 삶’ 이라며 회사를 원망하던 시간도 널브러진 내 옆에 고양이가 다가와 기대는 순간, 그 자체로 충만해졌다. 누가 고양이는 외로움을 타지 않는다 했던가. 내 고양이는 발소리만으로 나를 알아채고 현관에 마중을 나온다. 내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싫어서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온다.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일하는 날엔 졸린 눈을 껌뻑이며 곁을 지킨다. 잠을 잘 때면 꼬박꼬박 이불 속으로 들어와 살을 맞댄다. 빈틈을 파고들어 스며든 사랑이 내 모든 시간을 흠뻑 적신다. 바쁘지 못한 시간 또는 바쁨을 준비하는 시간에 불과했던 일상의 빈틈이 온통 고양이다. 고양이가 나를 기다리고, 반기고,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을 모두 합하면 나의 하루가 된다.
가장 순수한 관계
고양이와 나누는 교감이 더욱 경이로운 이유는 내가 살면서 경험한 가장 순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줄 수 있는 것은 꾸준한 진심뿐이다. 어떤 자기과시도 포장도 고양이 눈앞에는 부질없다.
나는 내 고양이를 길에서 만났다. 친해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길고양이 한 마리라도 마주쳐본 사람이라면 안다. “귀여워!”를 외치며 카메라를 켜고 달려가는 순간 고양이는 도망친다.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미사여구도, 비싼 간식으로 가득 채운 가방도 소용없다. 꺼리지 않을 만큼만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한번 관계를 맺으면 기다림에 보답하는 꾸준함을 보여줄 때 비로소 고양이는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 손길을 기억한다.
‘적당히 관리하는’ 인연일랑 없는 동물에 비하면 우리 인간끼리의 관계란 얼마나 피상적인가. 인맥 또는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관계가 버거워질 때가 있다. ‘사귀어둘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포장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크고 작은 허풍으로 속고, 속이고, 속아주며 사회는 하하호호 굴러간다.
오로지 마음으로 얻는 마음
동물을 한 지붕 아래 들이는 순간, 그나마 있던 포장도 송두리째 벗겨진다. 오히려 싫어하는 일을 왕창 해야만 한다. 온몸을 비틀어 거부해도 약을 먹이고, 으르렁거리며 불만을 표해도 입에 문 사람 음식은 뺏어야 한다. 양치를 시키고, 씻기고, 수시로 “안 돼!”를 외친다. 괴롭히는 것 같은 행동 안에 있는 진심이 닿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어쩌면 영영 다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막막함을 애써 외면하며 줄 수 있는 사랑을 모두 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그렇게 싫어하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는데 내 고양이는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내 고양이에게 미움받을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진심을 진심으로 돌려받는 관계. 한 생명체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고 있는 게 아닐까.
동물이 지닌 묘한 힘
길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캣맘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동물을 위하는 행동을 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반려동물에게 정성을 쏟는다고 착한 척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하긴 개인적으로 ‘소유’조차 하지 않은 동물에게 베푸는 선은 누군가의 이해 범주를한참 넘어선 것일 수도 있겠다.
정작 캣맘이나 동물권 운동가 가운데 자신의 행동을 ‘선행’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한다고 말한다. 동물이란 존재에는 묘한 힘이 있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해준다.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악의를 가질 줄 모르는 동물을 상대로 인간이 해야 할 선택은 매우 명징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종종 ‘배워서 하는 선’을 행한다. 매사에 아무런 계산 없이 이타적이고 선한 선택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한 탓이다. 너무 착하면 바보 소리를 듣고, “나만 손해 안 보면 돼!”가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인간답게 남아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때론 부작용도 생긴다. 100% 진심이 아니었던 선행 끝에 ‘아, 괜히 오버했어’ 하는 자책이 따르는 것이다.
내 안의 선을 확인하게 하는 존재
이런 내가 한 치의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없이 행할 수 있는 선은 모두 동물과 관련 있다. 내 고양이를 위해 내리는 선택, 크고 작은 인내와 희생에는 한 톨의 억지도 없다. 이 사랑은 나아가 모든 고양이를, 모든 동물을, 전체 생태계와 지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확장되었다. 이 역시 누구의 눈치를 봐서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에 간직하는 마음이다.
고양이는 늘, 내 안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끌어낸다. 팍팍한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느라 한껏 좁아졌던 나의 시야를 넓혀준다. 그릇이 작고 미숙한 나지만, 그래도 어느 한구석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선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었다. 내 안의 선을 믿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어디까지 선해질 수 있을까. 우리 안의 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 답을 반려동물에게서 찾는다. 아마도 신은 이를 위해 인간 곁에 동물을 보냈을지 모른다.
나보다 일찍 떠날 생명을 거두는 마음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일은 8년의 육아와 8년의 병시중이라는 말이 있다. 동물의 시간은 인간보다 빠르게 흘러 어린아이 돌보듯 키워두면 어느새 노년이 되어 병치레를 시작하곤 해서다. 한 생명을 가족으로 곁에 둘 때 그 정도 헌신은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호자는 십수 년을 진심으로 보살핀 동물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된다. 반려동물의 수명이 인간보다 짧기에 이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한 생명의 보호자가 된 지 어느덧 7년. 혹자가 말한 육아 기간이 얼추 끝나간다. 이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고양이와 눈을 맞추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싶어 아득해질 때도 있다. 어쩌자고 이 생명을 가슴에 새겼을까. 끝을 알면서도 뛰어들었다고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젊은 부부가 부모 됨의 무게를 오롯이 이해하고 아이를 갖지는 않듯 동물을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한 생명의 평생을 책임질 결심을 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앞으로 펼쳐질 십수 년의 시간을 살아본 것처럼 다 알 수는 없었다. 그 상실의 깊이는 진심으로 교감하고 사랑에 빠진 뒤에만 짐작할 수 있으니까. 먼 훗날 내가 이 고양이의 사진을 부여잡고 엉엉 울게 되리라는 걸 알아채버린 순간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어떤 경이로운 우주
고양이와 둘이 사는 30대 중반 여성으로서 나는 수많은 잔소리에 둘러싸여 지낸다. 때를 놓치면 영영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의 소리를 듣는다. 출산 얘기다. 많은 사람이 ‘자식을 낳아야만 경험할 수 있는 인간적 성장’을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되는 경이로움은 물론, 내 남은 젊음을 모두 바쳐도 아깝지 않을 무엇이겠지. 경험한 이들의 행복을 의심한 적은 없다. 다만 인간의 삶 속엔 여러 우주가 있다. 어떤 경이로운 우주는 반려동물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열린다. 한 마리의 동물이 이 세상 누구보다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러나 그 존재와 영영 같은 언어를 쓸 수도없고, 내 마음의 절반도 끝내 전하지 못할 것만 같을 때. 그리고 맞이한 이별에도 책임을 다할 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지막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짐을 느끼면서도 최선을 다해 사랑할 때. 모르고 덥석 끌어안은 책임을 저버리지 않기로 결심할 때. 그럴 때 우리는 삶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동물은 그 어떤 인간도 내게 주지 못할 경이를 선물하고 있다.
패션과 아트, 반려동물의 만남
반려동물은 동반자 때로는 뮤즈 그 이상의 존재다. 주인만큼 열일하고 주인을 닮아 감각적인, 조금 특별한 반려동물의 삶을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