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증기 속으로
나에게 외국 여행은 피부에서부터 시작된다. 공항이나 항구나 역이나 정류장을 나오자마자 피부에 닿거나 달라붙는 습기의 정도, 콧속을 간질이고 허파를 가득 채우는 공기의 질감, 뜨겁거나 차가운 기온 등이 여행의 진짜 인상을 결정한다. 낯선 감각에 긴장해 소름을 일으키는 피부 감각을 길잡이 삼은 후에야 이질적 경관과 풍물에 주목하면서 이미지를 포집하는 시각과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어를 주워 담는 청각 등이 비로소 자리 잡는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는 어떠했던가. 수증기 속으로 들어선 듯했다. 끓는 물이 가득 담긴 솥뚜껑을 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 전체가 뜨거운 안개로 가득해서,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익는 듯하고, 폐 속 온화한 공기가 달아올랐다. 보이지 않지만 공기의 뱀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느낌이 얼굴에서 발끝으로 스멀스멀 내려갔다. 피부가 나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 온몸이 팽팽히 긴장했다. 이럴 때 인간은 활이 된다. 낯선 긴장, 이상한 흥분 상태 덕분에 감각의 화살들이 평소와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한다. 여행이란 감각의 새로운 배치법을 연습하는 것이다.
인스타스케이프라는 함정
여행자가 흔히 빠지는 첫 번째 함정은 무엇일까. 인스타스케이프insta-scape다. 우리는 산 설고 물 설은 곳에서 진저리치는 감각을 잠깐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배에서, 기차에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장소를 찾아, 비슷한 구도와 포즈로 몇 장의 사진을 남긴 후 서둘러 다른 이동 수단에 몸을 싣는다. 버스나 택시나 지하철 내부 환경은 전 세계 모든 곳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세부적인 차이는 다소 있을지라도 어디에 있든 서울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되돌린다.
인스타그램은 세상 모든 곳을 게시물 사진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탑승장을 찍은 ‘도착했어요’, ‘떠나요’ 사진을 제외하면 하노이 공항에서 가장 흔한 사진은 파파이스 사진이다. 한심하고 처참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무의식이다. 우리는 자본의 절대명령에 복종한다. 언제,어디에서나 자본의 임재를 표현한다. 하트 중독자가 되어 쌀국수 사진을 올리면서 인스타그램의 지시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사진은 아무 기록도 아니다. 베트남 쌀국수 맛과 서울 쌀국수 맛의 차이를 표현할 수 없다면, 평범한 사진은 돈을 써서 배를 채웠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데이터 부스러기가 될 뿐이다.
습관대로 하려면 왜 떠나왔는가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낯선 곳에서 곧바로 익숙한 것을 찾아내고, 어떻게 해서든 평소처럼 행동할 방법부터 고민한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 처음 간 여행자는 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한 후 다음 행동을 안전하게 이어가려고 서둘러 안내 지도나 표지판을 찾는다. 충분할 만큼 적절한 안내를 받지 못했을 때, 이들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하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는가. 인간은 안락을 즐기지만 권태를 혐오하고, 모험을 꿈꾸지만 위험을 싫어한다. 문제라면 모험과 위험, 안락과 권태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권태 없는 안락도, 위험 없는 모험도 없다. 세계가 낯설어 견딜 수 없을 때에만 우리는 간신히 새로운 자신을 찾아낸다.
아니, 아니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바라고 꿈꾸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계다. 인간은 어쩌면 세계의 하인에 불과하다. 노예가 주인의 지시를 받아 물건을 만들듯, 인간은 세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언어로, 현실로 구현하는 수행자에 불과할 뿐이다. 세계가 촉발하는 자극이 없다면, 인간은 단 한 조각도 새로운 것을 이룩할 수 없다. 집에서 왜 떠나왔는가. 논리적 이유는 없다. 권태 속에서 하루도 더 견디지 못할 마음이, 미지의 세계가 부르는 소리에 응답했을 뿐이다. 내면의 부름이 우리를 여행자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약한가. 시간을 쪼개서 간신히 떠나온 다음에도 지금 이 순간이 던져오는 새로운 신호에 반응하기보다는 서울의, 인스타그램의 간섭에 굴복해 그 명령대로 행동해버리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스피노자의 뇌>(사이언스북스)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외부 자극에 대한 동물의 반응을 ‘생리적 반응의 집합’인 정서(emotion)와 ‘정서에 대한 의식적 지각’인 느낌(feeling)으로 나누어서 정의했다. 물리가 정서를, 정서가 느낌을, 느낌이 생각을 규정한다. 확인되고 음미되지 않은 정서는 순식간에 의식 너머로 사라진다. 짬을 내 잠시라도 정서를 숙고하는 시간 없이 느낌을 제대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정서와 느낌으로 나 자신을 설득할 줄 알 때까지, 언어가 새로운 표현을 얻을 때까지 가만히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지에 와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한참 동안 정류장 의자에 앉아 고독에 사로잡힌 채 정서에 집중하면서 느낌을 확인하는 일이다.